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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Dec 23. 2020

민들레와 어린 왕자

내가 알던 사람, F에 대한 이야기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것보다 도서관에 앉아서 책 읽는 것이 더 즐거웠던 초등학교 시절. 고학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같은 반 애 하나가 끼워준 점심시간 피구의 맛을 알게 되었다. 잠깐 운동장에 나갔다 들어오는 그 시간 때문이었는지, 그때쯤부터 나는 얼굴 위에 조금씩 깨알 같은 기미가 올라왔다. 그래도 덕분에 내가 사람들과 움직이며 노는 것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외의 시간에는 도서관에 가서 다양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책들을 빌렸다. 나는 하굣길에도 걸어가며 책을 읽었고, 아님 얼른 집으로 뜀박질해서 내 방에 들어가 책을 읽기도 했다. F는 나처럼 책 읽기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우리는 둘 다 추리소설을 좋아했고, 세계 최고의 탐정인 셜록 홈즈를 좋아했다.


 우리는 공책 하나를 공유했다. 두꺼운 양장 제본이 된 무선 공책이었는데, 제일 앞장에 그림 하나를 그렸다. 어린 왕자. 그가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원작의 내용이 어떠했는지 상관없이 우리는 번갈아가며 그 공책의 작가가 되었다. 어린 왕자는 우리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기도 하고, 장미나 여우가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우리의 합작품은 '어린 왕자 공책'만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학교 수련회라는 이름으로 집 아닌 곳에서 친구들과 다 같이 공식적으로 잘 수 있는 행사가 생겼다. 처음으로 친구들과 방을 쓰고 한 방에 모여서 자는 경험에 들떴던 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F와 나, 그리고 같은 방을 썼던 친구들은 숙소에 도착하자 방구석에 각자의 짐을 대충 풀어놨다. 그리고 밤이 되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방 가운데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그리고 진실게임을 시작했다.

 이름은 진실게임이지만 정확하겐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더라는 소문과 추측을 확언할만한 증언을 받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저 다른 애들의 입에서 흘러나올 비밀들, 발화되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는 그 모순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순수하거나 순진했던, 아님 둘 다 해당했던 애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앞머리 한 마디를 노랗게 브릿지 염색을 한 같은 반 남자애를 좋아한다고. 방 안에 있던 친구들은 처음엔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 비밀을 알게 된 기쁨 때문인지 환호를 했고,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어떤 생각을 냈다.

 "그럼 우리가 이어 주자. 우리가 편지 써서 오늘 고백 도와주면 어때?"

 진심이었는지 장난이었는지 모를 그 말에 모두들 동요했고, 정작 누군갈 좋아하는 당사자인 애를 놔두고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한다고 소문난 나와 F가 바로 그 고백편지의 작가로 결정되었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일단 우리는 고백을 하려는 친구의 말을 먼저 듣고서 글을 쓰기로 했다. 아주 단순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녕, 나는 누구누구야. 나는 너를 좋아해. 내 마음을 받아줄래? 

 이 세 문장을 그대로 적어서 보내기엔 작가 체면이 설 수 없었다. 그때 나에게 번뜩 떠오른 것은 최근에 읽었던 꽃말 이야기 책이었다.

 F에게 이 생각을 말하자 정말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고, 나는 기억 속에 남아있었던 꽃말을 끄집어내어 고백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방 안에 있던 친구들은 우리가 글을 쓰니 자신들은 종이꽃 가루라도 만들어서 뿌리겠다며 각자 분주하게 뭔갈 하나씩 맡았다. 

 우리가 골랐던 꽃은 민들레였다. 꽃말은 지고지순한 사랑 같은 거였는데, 고백하는 친구의 이미지와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편지를 다 쓰고서 우리끼리 낭독을 해봤는데 꽤나 괜찮았다. 이 정도라면 고백은 아주 성공적일 거란 생각에, 우리는 민들레에게 우리가 쓴 편지를 손에 쥐어주고, 또 다른 누군가가 선두로 나서서 같은 방을 쓰던 여자애들이 다 같이 고백을 도와주러 남자애들 방에 가기로 했다. 두근거렸다. 이러다가 정말 둘이 사귀게 되면 어떡하지? 방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 선두에 있던 애가 브릿지 머리를 불러달라고 했다. 남자애가 문밖으로 나오자 민들레는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편지를 내밀었다. 그 순간에 옆에 있던 우리는 종이꽃가루를 하늘로 던지고 환호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만들었다. 방안에 있던 다른 남자애들도 문 밖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다가 야유를 하기도 했다.

 브릿지 머리는 짜증을 냈다. 장난치지 말라고. 그리고 편지가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우리는 당황스러웠지만 분위기가 가벼웠던 건 사실이었다. 우리가 몰려갔던 방문 앞은 이미 한참 어질러져 있었고 어수선했다. 한껏 들떴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이걸 수습할 연륜이 없었던 우리들은 민들레를 데리고서 우르르 여자 방으로 도망쳤다. 물론 바닥에 버려진 편지도 챙겨 왔다. 여자애들은 오늘 고백하고 바로 차여버린 민들레를 위로해줬다. F와 나는 편지에 이상한 부분은 없었는데, 브릿지 머리가 편지만 읽었어도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학교 수련회 첫날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F와 나는 그 후로도 계속 어린 왕자 공책을 차근차근 채워나갔다. 한 권을 가득 채워 새로운 공책을 하나 더 만들어야 했고, 새 공책을 채워갈 때쯤엔 우리가 예전만큼 자주 만나기 어려워졌다. 서로 다른 중학교를 지망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다니는 학교가 달라지자 굳이 따로 연락을 해서 만날 만큼 우리 사이가 애틋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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