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사람,X이야기
우리의 첫 데이트 장소는 한강이었다. 소개를 받은 이후 장장 두 달가량 매일 문자를 주고받고, 한 번 전화 통화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사이가 됐지만,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몇 줄의 문자메시지와 몇 시간의 목소리로 알아가던 그 사람을 현실에서 마주한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어바웃 타임'과 '이터널 선샤인'을 좋아한다는 말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놀랐었다. 편하고 솔직하게 내 생각과 취향을, 내 오랜 이야기들을 해도 그것을 다 재미나게 들어준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점점 그가 그리워졌고, 그건 그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몇 번의 식사와 커피, 한강 드라이브와 산책 끝에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내 손보다 좀 더 두툼하고 따뜻했다. 가끔은 손에 땀이 배어 나오기도 했다. 몸이 찬 편이라고 했던 사람인데 자꾸만 잡은 손엔 땀이 흘렀다. 나는 괜히 장난을 치고 싶다가도 그의 얼굴을 보며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고 풋, 웃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같이 걸었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누군가에겐 그저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었을 벽돌담 하나가, 진한 햇살의 황금빛으로 덮이는 것을 보았다. 아직 긴팔 옷을 입고 두툼한 패딩을 챙겨야 하는 계절이었지만, 금세 이 찬 바람은 가시고 따뜻한 날이 오리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봄이 온다는 건 날씨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놀라운 발견과 새로운 배움이 가득했다. 무궁무진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열렸고, 나는 그 문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탐험가였다.
정확히 어느 지점부터였을까 돌이켜보며 나는 그저 이때쯤이었으리라 추측만 하지만, 그의 삶에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다. 가까운 곳에서 자주 만나기 어려웠던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그를 위로하고 격려할 뿐이었다. 그와 함께 한 공간에 있을 수 없다 해도 그에 대해 생각하고, 내 마음들을 글로 정리했다. 멋지고 화려하게 꾸미기보다는 솔직하고 정확하게 내 마음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몇 통의 편지와 일상에서 요긴하게 쓰일 물건들, 무용하더라도 즐거운 기분을 선사할만한 선물을 박스에 가득 담아 택배를 부쳤다. 그가 고마움을 표현할 때, 그의 반응과 상관없이 이미 내가 이 일을 너무 좋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일이 많고 바빴다. 저녁식사 이전에 정해진 퇴근시간이 있음에도 그는 자발적인 야근을 했다.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런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자정이 넘어서까지도 퇴근하지 않는 일상에 그는 건강을 잃어갔다. 그리고 점점 내가 보내는 메시지의 내용과 그의 답변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나의 취약점이 온 세상에 공개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괜찮았고, 그래도 기다릴 수 있었다. 오래 참고, 그의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며, 그를 사랑한다는 내 고백에 대해 스스로 책임있게 행동하고자 노력했다.
이제는 그의 일상에 어떤 일들이 있는지조차 잘 알 수 없어졌을 때쯤, 나는 그가 사는 동네의 작은 공원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다. 작은 정자 앞 벤치에 앉아, 푸르른 나뭇잎이 우거진 풍경을 바라보며, 하늘이 점점 꺼메지고 공원 가로등 불빛이 켜질 때까지 우리는 이야기를 했다. 말없이 한참을 그냥 서로의 손만 잡고 있다가도, 솔직한 얘기를 꺼내기 위해서 한 번만 나를 안아달라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나를 싫어하느냐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질문을 잘못 골랐던 것 같다. 그날의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십 분만 통화하자고 문자를 남겼다가, 한 시간이 채 못 지나서 아니라고 그냥 그를 기다리겠노라고 내 말을 번복하다가, 두 시간이 지나서 다시 너를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문자를 남겼다. 너의 생각을 듣고 싶으니 꼭 답변을 해달라고.
며칠이 지나도 답이 없어서 나는 다시 그에게 문자를 했다. 나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내가 정한 기한까지만 기다릴 테니 그 안으로만 답변을 달라고. 그에게서 다음날 문자가 왔다. 내일 전화하겠노라고. 내가 정한 기한의 마지막 날, 하루 종일 그의 연락을 기다렸고, 또 몇 번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답변은 없었다. 나는 자정까지 기다리고, 그 안으로 통화할 수 없다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문자로 남겨두겠노라고 그에게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묵묵부답인 휴대폰 화면이 아래를 향하도록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고스톱을 처음으로 배웠다. 명함보다도 작은 카드 안에 자잘하게 그려진 그림들의 이름과 점수가 매겨지는 방식, 게임의 진행방법을 배웠다. 초심자의 운이 따랐는지 패가 좋게 나와 몇 판을 이겨보기도 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이미 게임이 끝나버려 독박을 쓰기도 했다.
점수가 나서 '고'와 '스톱'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 적도 있었다. 돈을 걸지 않고 재미 삼아하는 게임이었으니 이기든 지든 상관없단 마음이었다. '고'를 선택할 때도 있었고, '스톱'을 선택할 때도 있었다. 게임에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고스톱이 재미있는 게임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고스톱을 치다가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켜보니 자정이 지나있었고, 연락이 온 것은 없었다. 나는 다시 내 방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 문자 메시지 화면을 켰다. 관건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그에게 정확한 표현들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기에.
그동안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장들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려가며 적어 내렸다. 그에게 발송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들진 않았다. 더 이상 생각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X를 내 인생에서 떠나보냈다.
문자를 다 보내고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다가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