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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Nov 12. 2020

냄비밥, 김치찌개

내가 알던 사람, W형 이야기

첫 번째 대학생활 1년을 마치고 맞이하게 될 겨울방학은 꽤 길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 맞이한 긴 겨울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하던 게 무색하게, W형에게로부터 협업 제의가 들어왔다. 작품을 하나 같이 하자고.

작품이래 봐야 대학교 동아리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이었지만, W형은 이미 한참 전에 졸업한 사람이었다. 지난 1년간 열정적으로 동아리 활동을 하던 나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학기가 끝나고 방학을 맞이할 때쯤, 자신의 계획에 있던 일을 제안한 것이었다. 

나 말고 W형의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고,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은 학교 지하에 있는 동아리 방에 모여서 두 달가량을 정기적으로 만나서 작품 연습을 했다.


우리 세 사람은 평소에도 서로 살갑게 연락하며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작품을 하기 전에도, 후에도. 따로 셋이 모여서 식사를 한 적은 없다. 커피 한 잔도. 그저 작품을 하고 싶어서, 연극을 해보고 싶어서, 모였던 사람들이었다.


연습기간 중에 하루는 평소처럼 학교 지하에 있는 동아리 방엘 갔는데 W형이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냄비를 꺼내고 있었다. 뭔고 하니 오늘은 같이 밥을 해 먹으려 한다고 했다. 동아리방 구석에 처박아둔 식기들이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본인이 직접 설거지를 하고 식사 준비를 할 테니 걱정 말란 얘기에 그저 소파에 몸을 파묻고 구경만 할 뿐이었다. W형은 김치에 쌀에 국물 낼 멸치까지 싸왔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캠핑용 냄비에 물을 한가득 담아와선 불 위에 올려놓고는 국물을 먼저 내기로 했다. 요리에 자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엄마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게 있던 나는 아마도 멸치는 두 세 개면 충분할 거라고 했지만, W형은 못 믿는 눈치였다. 그래도 좀 더 넣어야 국물이 진하게 우러나지 않을까, 하고는 비닐봉지에서 국멸치를 한 움큼 쥐어서 물에 풍덩 빠트렸다. 냄비 물 표면에 멸치가 가득했다. 몇 마리 건질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냥 뚜껑을 닫았다.


또 다른 냄비에는 쌀을 한가득 넣고, 물을 넣고, 불을 올렸다. 냄비밥이라고 했다. 냄비밥은 등산가서나 뚜껑에 돌 올려놓고 해 먹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습기 차고 눅눅한 지하에서 해 먹는 것인 줄은 몰랐다.

끓어오른 물이 냄비 뚜껑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때 뚜껑을 열어보니 멸치가 잔뜩 불어서 물 위로 아래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나는 깔깔 웃고, W형은 국자로 서둘러 멸치들을 건져냈다. 그리고 준비해온 김치를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서 살짝 노랗게 변한 국물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다시 뚜껑을 닫았다.


간단한 대본 리딩을 하다가 밥이 다 된 것 같아서 냄비를 열어 주걱으로 밥을 푸고, 그 뒤엔 어찌어찌 잘 끓여진 김치찌개를 퍼올렸다. 일회용 밥그릇, 국그릇에 반투명 플라스틱 수저와 나무젓가락으로 하는 조촐하지만 배부른 만찬이었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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