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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Jul 20. 2020

대학 선배, 적당한 거리

내가 알던 사람, Q언니 이야기.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입문한 나에게 Q언니는 롤모델이었다. 언니는 평소엔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다가도 가끔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곤 했다. 난 언니가 철석같이 서울 토박이일 거라 생각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그 사투리가 괜히 흉내 내는 것 같고, 낯설고, 그랬다. 언니는 복학생이었다.


Q언니는 진한 쌍꺼풀 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확신했다. 아마도 쌍수의 결과물일 거라고. 한 번도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물어봤어도 대수롭잖게 대답해줬을 것이다. 어디에서 얼마를 주고 했는지. 어쩌면 고등학생 때 했을지도 모른다.


한 학년 위 선배들도 크게 보이던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선 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도 학교생활을 같이 했다. 20대의 삶이 처음인 나에게 5살 많은 Q언니는 어른이었다.

Q언니는 술자리에서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학점관리도 잘하고, 두루두루 원만한 대인관계에, CC이기까지 했다. 언니의 남자 친구는 이미 졸업한 회사원이었다. 같은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와 꽤 오랫동안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나는 언니가 너무 멋져 보였다.


나는 Q언니가 들어간 동아리의 직속 부서에 지원했다. 그 부서에 관심이 있기도 했지만, Q언니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한몫했다. 언니에게 예쁨 받는 후배가 되고 싶었다.

언니도 내 바람을 알고 있었는지, 종종 언니의 집에 나를 초대해줬다. 지방에서 올라온 언니에게 자취는 필수조건이었다. 대학에 갔어도 통학을 했던 나에게 자취생활 역시 어른의 조건이었다.


학교에서 버스를 30분 타고 가면 있던 동네에 살던 언니는, 일 년 뒤엔 친오빠와 같이 살게 되어 한강 근처 쓰리룸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엔 작업실이 있었다. 이젤과 캔버스가 놓여 있는 작업실. 자기만의 공간과 심지어는 작업만을 위한 분리된 공간이 존재하는 집. 그런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멋져 보이고,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삶처럼 느껴지던지.


언니가 집 근처의 맛집을 알고 있다며 데려간 곳은 화덕피자 전문점이었다. 피자와 파스타, 샐러드까지 양껏 시켜서 마음껏 먹었다. 음식을 먹고 나서는 한강을 걸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그때 나는 남자애처럼 짧게 머리를 자르고 갔다. 내 인생 최초의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이었다. 바꾼 머리를 처음으로 보여준 사람이 Q언니였다. 언니는 내게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해주었고, 그 말에 들뜬 미소로 나는 언니와 셀카를 찍었다.


우리는 한강 다리 밑의 그늘진 자리에 앉아서 우르르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비둘기를 구경하고, 자전거를 찌르릉 울리며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언젠가 우리도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자는 약속도 했던 것 같다. 검은 한강 물이 흘러가는 것도 구경했다. 그게 나의 첫 한강 나들이었다.


사람과 관계 맺는 일에 여전히 서툴렀던 나는, 대화할 때 얼마만큼이나 내 속 이야기를 열어야 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때와 장소를 잘 구별하지 못하고 진지한 얘기를 자주 꺼냈던 기억으로 보아, 재미있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그런 내가 편하게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사람이 Q언니였다.

최근 동아리 활동의 경향,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성, 내 진로에 대한 고민. 이런저런 나의 솔직한 생각과 의견을 언니는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그리고 나보다 5년 앞서 있던 경험과 시야로 내 의견에 보태거나, 반론하거나, 혹은 격려해주었다. 기특하다고.


내가 동아리를 그만둘 때, Q언니를 만났던 기억은 없다. 대신, 언니의 남자 친구인 선배가 나를 따로 불러서 정말 맛있는 스테이크를 사주었다. 좋은 일로 동아리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 인생 먹어본 중 가장 맛있는 스테이크였지만, 먹는 족족 속에 얹혔다. 선배는 이제야 밥을 사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동아리를 나가지 말라고 했으나, 내 결심도 이미 확고했다.

Q언니는 내가 동아리를 그만두게 됐던 그 학기에도 휴학을 하고 있었다. 공부를 하러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것 같다.


동아리를 그만두고 1년쯤 지나서였나, 학교 도서관 앞에서 Q언니를 정말 우연히 마주쳤다. 언니는 학교 자퇴서를 내고 도서관에 들어오려던 차였고, 나는 과제를 하고 도서관에서 나오고 있었다. 언니는 고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언니는 긴 머리를 탈색했다.

내가 동아리를 그만두는 과정에 Q언니는 없었다.


우연히 마주쳤던 그 날이었는지, 언제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장문의 문자가 왔다. Q언니였다. 나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있었는지, 혹은 실망이 담겨있었는지, 내용은 잘 기억나질 않는다. 어쨌든 나는 이미 확고했고,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확고한 내 생각이 담긴 답문을 보냈다.

나는 언니를 좋아했지만,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결국 언니도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했다.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나의 선택이었다.


이제는 기억이 뒤엉켜서 뭐가 먼저고 뭐가 나중 인지도 분명하지가 않다. 그래도 가끔 Q언니 생각이 난다. 언니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만취한 언니는 나에게 자꾸 미안하다고 했었다. 가끔 후회가 됐다. 그때,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그만뒀어야 했을까 하는 후회, 그렇게 매몰차게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것 까진 없지 않았나 하는 후회.


그러나 그 장문의 문자 이후로 연락이 온 적은 없었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거기까지가 최선인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의 적당한 거리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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