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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Apr 25. 2021

맥주 한 잔

내가 알던 사람, Y이야기

 스물 하나,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상 이제는    같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교수님은 소개팅을 제안하셨다.  주전공과목은 아니지만 소규모로 10명도  되는 인원이 모인 수업에서 가장 어린 사람은 나였다. 내가 아직 제대로  연애   못했단 사실이 안타까우셨는지, 교수님은 경험 삼아서라도   남자를 만나보라며 소개팅을 적극적으로 주선하셨다.

 나는 좋지도 싫지도 않은, 어쩔 줄 모르는 마음으로 이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수업의 마지막 시간은 학교 근처 화덕피자와 맥주를 파는 가게에서 뒤풀이를 가장한 나의 소개팅이었다.


 Y는 교수님이 그 학기에 출강한 다른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그는 멀끔하니 첫인상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뒤풀이 자리에서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같은 수업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라, 분명 불편했을 텐데도 Y는 수더분하니 무리에 잘 녹아들었고, 곧잘 웃었다.

 나는 맥주도 못 마시고 피자만 찔끔 먹고 가끔 힐끗 그를 쳐다보다가 화장실을 갔다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서 별 말도 못 붙이고 앉아서 얼른 이 자리가 파하기만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 없이 Y와 나, 단 둘이서 만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뒤풀이가 끝나고서 Y가 내 연락처를 직접 받아갔는지, 아님 교수님을 통해 받아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었고, 인문계열 전공이라는 점도 비슷했다.

 비슷한 관심사의 주제로 막힘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그랬을까?


 Y는 내가 쓰고 있는 글을 보고 싶다 말했고, 나는 부끄럽지만 그에겐 보여줄 마음으로 내 초고를 들고 가기도 했다. 그는 나름 진지하게 내 글을 보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누아르였는데, 때마침 유명 감독의 누아르 영화가 개봉했었다. 그 영화를 친구들과 보고 왔는데 Y의 인생영화란 말에, 나는 그와 몇 마디 더 나눠보려고 좋아하지도 않는 두 시간의 선혈이 낭자하게 흐르는 영상물을 꾸역꾸역 보러 갔다 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와 함께 영화관에 간 적은 없었다.


 순수하고 순진했던 내 마음은 Y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끈질기게 Y의 연락을 기다리곤 했다. 그는 본인의 집에서 30분 거리인 강남역으로 나를 불렀고,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2시간을 들여 그곳으로 갔다.

 우리는 파스타와 피자를 파는 음식점에 갔다. 그는 적당한 가격의 세트메뉴를 주문했는데, 음료를 각자 한 잔씩 골라야 했다.

 맥주 아니면 커피. 둘 다 선호하지 않는 음료였지만, 우리는 점심에 만났고, 나는 금주가였으므로 당연히 커피를 골랐다. Y는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맥주를 한 잔 시켰다.

 파스타와 피자, 그리고 음료 두 잔이 준비되었고, 우리는 시답잖은 얘기들을 했다. 음식점을 나와선 또다시 적당한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서 음료를 사마셨고, 나는 없는 형편에 가진 돈을 다 털어서 그의 음료값을 계산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그 시간이 좋다고 생각을 해서 한 번쯤은 더 Y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Y에게서는 점점 늦게, 그리고 점점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그의 SNS를 수시로 드나들고, 그가 나에게 던진 몇 가지 단서들로 그의 상황을 추측하고 상상하며 염려했다.


 갈 곳 잃은 감정은 홀로 부피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빵빵하게 부풀어버린 감정을 더 이상은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날, 나는 여전히 쉽사리 답이 오지 않는 Y에게 문자를 남겼다. 아주 오래 기다려도 답변이 없어서 전화를 걸었지만 그마저도 답변이 없어서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학교 도서관에 가서 어떤 여성이 짝사랑을 하다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이를 결국 만나게 되는 영화를 골라보았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 나는 영화 때문인 척 펑펑 눈물을 흘렸고, 휴대폰엔 Y의 마지막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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