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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May 19. 2021

오래된 일기장

내가 알던 사람, J 이야기

 J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평소 그의 말만 들어보면 딱히 그렇게까지 이 일에 열정이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곤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건 단지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솔하게 표현하는 걸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

 그는 매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 열심이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대부분의 동아리원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곤 했다. J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도 없다고. J는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심지어 그는 선배들의 얼차려에도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한 번은 우리보다 5년 정도 윗 기수의 선배가 몇몇 후배들을 운동장으로 불러냈다. 방학중 동아리 활동을 위해 모인 날이었는데, 명목상으론 신체 단련을 위함이었으나 그 안에 의도한 건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싶은 요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장 하나에 양 옆에 풋살장 두 개가 달려있는 크기의 운동장 외곽을 둘러싼 마라톤 트랙을 50바퀴 돌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직감했다. 이건 그 선배도 굳이 그 횟수를 다 돌라는 말은 아닐 거라고. 혹은 그렇다 해도 굳이 그 요구에 다 응할 필요는 없다고. 어느 정도 눈치를 봐가며 구색 맞추듯 몇 바퀴 운동장을 뛰다가, 더 이상 못하겠다며 지친 모습으로 운동장 한편에 나가떨어져있음 그만인 일이었다. 사실 그 선배가 원했던 건 정말로 그 운동장을 50바퀴 돌만큼의 체력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다들 투덜거리며 일단은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8월, 가뜩이나 덥고 습한 여름, 잠깐 밖을 걷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낮이었다. 열댓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다 같이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 둘 사람들은 트랙에서 벗어나 바닥에 주저앉았고, 후배들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을 제시했던 그 선배도 별 말없이 나가떨어진 사람들에게 물 한잔을 챙겨주기도 했다.


 과연 누가 가장 마지막까지 운동장에 남아 있을까, 평소 축구를 좋아하던 남자 선배 아닐까 하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계속 그 운동장을 달리던 건 다름 아닌 J였다. 몸에 딱히 근육이랄 것도 없어 보이고 오히려 말랐다는 얘길 주로 들어서 잘 좀 챙겨 먹으란 소릴 듣곤 했던 J가 계속 트랙 위를 달리고 있었다.


 30바퀴쯤 돌았을까, J가 적당히 그만 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중간에 그만두고 그늘 밑에서 쉬고 있던 선배 하나가 달리고 있는 J에게 가서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J는 끝까지 달리겠노라고 말했다. 선배는 그럼 자신도 같이 달리겠다며 J옆에서 같이 뜀박질을 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는지 금세 트랙 위엔 다시 J만 달리고 있었다.

 결국 J는 50바퀴를 다 채우고 나서야 뜀박질을 멈췄고, 다리가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J의 모습을 본 얼차려 선배는 별 말도 없이 그날의 모임을 끝내버렸고, 이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몇몇 다른 사람들은 미리 매점에서 사뒀던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J에게 건넸다.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 J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땀으로 쫄딱 젖어있었다.


 사람들은 J더러 독하다고 했다. 운동장을 그렇게 끝까지 뛴 건 그 선배를 맥이려고 한 것 아니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 그냥 동아리를 그만두면 될 일인데, J가 동아리를 나갈 일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동아리 생활을 열정적으로 할 필요 있나, 굳이 그렇게 곧이곧대로 할 필요 있나 하는 모든 일에, J는 마치 정해진 답이 이미 존재했던 것처럼, 그렇게 동아리 생활을 했다. 열정적으로.

 좋게 말하면 정석대로 살려고 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했다.

 

 그랬던 J가 몇 년 뒤 동아리를 그만뒀다. 동아리 공연을 한 달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다. 다들 J가 그러리라곤 생각 못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가 보여줬던 모습에 따르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J는 누구보다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었으나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열정을 끊임없이 표현했었다. 당시 그 공연에서 J가 맡았던 역할도 그의 그 대단한 열정을 높이 산 동아리원들이 그를 믿고 맡긴 일이었다.

 그러나 J는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분명한 설명도 없이 급작스레 동아리를 그만뒀다. 남겨진 사람들은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기간 동안 J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으며, 사과를 하러 온다던 얘기도 있었으나 정작 공연 날에 찾아오지도 않았다.

 처음 그가 동아리를 그만둔단 소식을 들었던 몇 사람들은 J에게 직접 연락을 하고 그의 집 앞까지 찾아가 그를 만나기도 했으나, 이미 그의 굳어버린 결심을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다 몇 달이 지나고서 J는 자신의 모든 SNS를 삭제했다. 그리고 휴대폰도 정지했다. 그렇게 J는 갑자기 사라졌다.


 10년 후, 나는 J의 일기장을 열어보았다. 

 그 오래된 일기장 안에는 20대 초반의 한 사람이 세상 속에서 자기 존재에 대해 알아가고자 애쓰던 몸부림이 담겨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솔직한 감정들과, 특정 인물을 향한 욕지거리도 종종 보였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슬프고 외로운 마음이 종이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용서받고 용납받고 싶었던 때에,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을 때에, J는 일기장에 일단 두서없이 모든 것을 털어내듯 적었고, 덮어두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조금은 J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는 생각도 했다. 그때는 미처 다 눈치채지 못했던 그의 표현과 행동들 안에 숨겨져 있던 솔직한 마음이 보였다.

 안쓰럽고도 기특했다.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자신의 삶을 이어왔다는 것이. 또 이제야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전혀 그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저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더 이상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알던 사람이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J를 용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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