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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Oct 21. 2023

시| 고래친구 이야기

처음 발행하는 시 01

01.

나의 손에 길이 든 고래가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내가 물가에만 가면

고래는 배를 뒤집고 두쪽으로 갈라진 꼬리를 흔들어 물보라를 만들었다.

나는 고래의 미끈한 배를 손바닥으로 싹싹 부비며 나도 너가 좋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반포래미안이나 서울대학졸업장이 있는 사람은 수백 있었지만, 고래를 가진 이는 유일무이했다.


나는 고래가 죽을까 조마조마했다.

고래가 죽으면 나의 유일함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래가 좋아하는 청어도 정성을 다해 길렀고, 하루가 머다하고 고래의 뱃등에 귀를 대어 소리를 들었다.




02.

고래에게서 전에 없던 소리가 나던 날에.


고래는 살아 있었지만

나는 물가를 뜰 수 없었다.

밤새 물가에 앉아

고래가 떠난

물길을_ 바라보았다.


나에게 지느러미 같은 것이 생긴 것이 그날 밤이었다. 급작. 발이 퉁퉁 부으면서 샌들을 신을 수 없게 되었고, 보드랍던 가슴이 미끈해지기 시작했다.


점심 때가 되자 뒷목덜미에 아기 주먹만한 구멍같은 것이 생겼고, 이내 저녁에는 바닥이 미끄러워 걸어다닐 수 없었다.


나는 그날부터 바다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고래가 사라지는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03.

그렇지만 나는

오랫동안 지내온 뭍이 그리워 매일같이 물가로 헤엄을 나왔고,


금세 지느러미가 없는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새친구는 물가에 무릎을 꿇고 나의 배를 손바닥으로 싹싹 부비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나는 하얀 배를 뒤집어 커다랗고 동그란 물보라를 그렸다.

바다에 물보라가 부서졌다.


2018.08.19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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