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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Oct 21. 2023

소설| LPD.nml

처음 발행하는 소설 02

여자 L은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P구에 산다. 그녀가 날 때 부터 그곳의 사람은 아니었다. 인간은 본디 불완전한 존재라, 그들의 결핍을 살피면 그들 삶의 주요한 결정들을 예상할 수 있다. L의 주거지 결정도 그녀의 결핍에서 기인했다. 그녀는 늘상 대화가 있는 곳으로 스스로를 옮겼다. 좋아하는 대화 상대가 있는 곳 주변이나, 궁금한 이야기가 흐르는 곳이면 그녀는 존재했다. 다만 여러가지 환경적 변화에 따라, 직접적인 대화에서 간접적인 대화로. 공간이 갖는 대화의 특성이 변화한 것이다. 이전에 살던 D구는 말이 나오는 곳이었고, 새롭게 정착한 P구는 말이 들어오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의 P구에서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온 동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L은 새벽같이 일어나 침대옆 창문 바깥을 응시한다. 가능한 허송세월의 오전을 보내고 오후 두시가 넘어가면 김밥을 마는 가게에서 파는 반찬 세개를 집어온다. 식후에 걸으라는 의사의 말을 절반만 수용하여 식전에 오래 걷는다. 유행이 지난 노래를 들으면서 번화하지 않은 골목만 골라서 걷는다. 산책 후에는 간단한 점심을 한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일들을 몇가지 해결하고, 오후에는 주택을 개조한 카페에 가서 차갑거나 뜨거운 커피와 손가락 두개만한 디저트를 먹는다. 번화가일 필요가 없는 하루의 궤이다. 그녀의 생을 어떤 토막으로 잘라도 비슷한 동선이 관찰된다. 사는집 주소나 들락거리는 가게의 이름만 달라질 뿐.


결핍의 이면에는 한 인간의 역사가 있다. 이미 겪어온 것들. 결핍이 결정을 토막낸다면, 한 인간이 지나온 역사는 결정들의 마디 사이사이를 채운다. 사람들은 골똘한 선택 끝에 생이 변화했다고 믿지만, 사실상 다시 같은 궤를 누적하게 되는 셈이다. 어쩌면 각각의 주어진 태를 벗어나는 일은 각 개인의 믿음 속에서만 존재한다. 실은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사람에게는 이번 생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능력치가 주어진다. 고민과 결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적극적인 개입 행동이 구성원으로 하여금 선택한 양 믿어지게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선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카페는 이층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창문에 바짝 붙어 카페 안이나 밖의 사람들을 관음하기에 제격이다. 창틀이 어깨까지 올라오는 자리는 특히 ‘실용적’이다. 바깥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이면, 창문 너머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실루엣은 노력없이 자연스러운 구성이 된다. 이 때문에, 적당히 높은 창 옆의 테이블은 대개 행동이 느리고 서툰 그녀를 안심시킨다.


그녀는 대체로 말이 없다. 하루에 한 마디의 말을 하지 않는 날도 허다하다. 그녀는 말을 흡수하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 가장 편안한 자리에 앉아서, 공간의 안팎에 놓여진 사람들을 관찰한다. 한 번에 테이블 수 만큼의 말을 흡수한다. 그녀는 번화가의 말을 흡수하기 위해 P구로 이사했다. 이곳은 가만히 멈춰있어도 말들이 채워진다. 오늘은 열두명의 구성원으로부터, n가지의 취향과 m가지의 고민 l가지의 가십을 청취했다. 청취는 주된 일과이다.


번화가에서는 주로 멀끔하고 젊은 사람의 단면을 묶어서 볼 수 있다. 아직 스스로의 운명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의 구성원들. 감정은 숨김을 모르고 생각에는 한계가 없다. 골똘한 선택으로 자신의 궤를 벗어날 수 있음을 믿는 상태이다. 젊음의 경계는 또렷하게 드러난다. 가능성에의 믿음이 그것을 자아내는데. 대개 시선을 끄는 모자나 신발, 마스카라 같은 것들로 스쳐가는 기회들에 눈에 띌 수 있도록 노력한다. 또, 음성에 강단을 실어 다가오는 변곡점들에 대해서 늘어놓는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자주 관찰되느냐가 순수의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녀는 순수를 잃은 적은 오래라고 생각했다.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음의 반대는 성숙이라.


2023.05.1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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