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낵 컬처, 웹툰 작가, 그리고 순정만화
꽤 오래전부터 '업'과 거리두기를 해오고 있어요. 자꾸 업의 성과를 자신의 가치로 결부시켜 판단하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오늘도 꽐랄라라> 조회수가 <가슴도 리콜이 되나요>보다 확 떨어진 것을 체감한 때부터 거리두기를 시작했습니다. 데뷔작보다 스토리도 기획도 더 열심히 준비했는데 독자들이 통 읽어주질 않으니 힘이 안 나더라고요. 조회수, 평점, 댓글 수, 랭킹, 해시태그 등 눈에 보이는 모든 정량 지표들이 '네 가치는 딱 여기까지'라고 가리키는 것 같았어요. 점점 나약해지는 내가 꼴사나워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업이 반드시 자아실현의 도구가 될 필요는 없어."
그래서 저는 업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부담을 덜어내니 그림 그리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더라고요. 나아가 "그렇다면 나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것이 글쓰기였고, '돈벌이를 위한 웹툰'이 아닌 '좋아서 그리는 그림일기'였으며, 틈틈이 벌려 놓는 사이드 프로젝트였습니다.
최근엔 마음 맞는 작가님들과 단편만화집을 내기 위해 사부작사부작 준비하고 있어요. 다들 연재 중인 분들이라 단기간에 뚝딱 완성하기는 힘들 것 같고, 내년 하반기에나 출간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넉넉히 일정을 잡았지요. 이제 막 콘셉트와 개별 스토리를 구체화한 단계예요. 제 단편작은 꿈도 희망도 없는 우울한 내용인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 로맨스 말고 다른 장르도 그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이러는 건가?'
흔히 웹툰을 '스낵 컬처'라 부른다죠. 과자 먹듯 짧은 시간 내에 즐기는 콘텐츠라고 합니다. 물론 이런 이유로 독자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거겠지만, 가벼운 콘텐츠를 만들어낸다는 이유만으로 제 가치도 가볍게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 싶었어요. 장르적인 특성도 한몫했지요. 전 순정만화를 좋아하고 또 앞으로도 쭈욱 순정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하지만 이것이 지속되면 혹자들이 '저 작가는 다른 장르는 못 그리나 봐' 하고 단정 지을까 봐 내심 불안했거든요. 그래서 단편작을 지금과 전혀 다른 결로 준비하는 제 동기가 그릇됐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님들과 화상회의를 하다가 슬며시 이런 속내를 털어놨는데, 모 작가님이 이러시더라고요.
"작품으로 내 가치를 증명하겠다는 게 잘못된 거예요?"
아, 틀린 건 아니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향해 달려가는 거니까. 동기가 어떻든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결국 내 몫인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순정만화를 좋아하면서도 순정만화를 그리는 나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는 걸.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만화가 좋은 만화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내용이 촘촘하고 반전의 반전을 더하는 만화가 좋은 만화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스스로 '스낵 컬처'라는 단어에 갇혀 제 가치를 마음대로 훼손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고 더 당당하게 로맨스를 좋아하려고요. 저는 로맨스가 좋아요. 우선 저는 알아주는 사랑꾼이고요, 아직 세상에는 사랑이 넘친다고 생각하는 낭만주의자이며, '뇌가 분홍색'이 특장점인 사람입니다. 뭐든 로맨스 혹은 19금으로 연결시키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앞으로 더더욱 당당하게 분홍분홍해질 예정입니다!
* 덧)
그림일기는 인스타에서도 같이 올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저는 브런치가 더 마음이 편해요. 주절주절 긴 글을 쓰기에 최적화된 UI 때문이기도 하지만, 뭐랄까, 제겐 대나무 숲 같거든요. 누구나 언제든 이 공간에 들어올 수 있지만, 사실상 글 혹은 저에 대한 관심이 아니면 애써 찾아오기 힘든 곳이잖아요. 그래서 일기 쓰듯 편하게 징징거리게 됩니다. 새벽에 쓰는 글은 감성이 차고 넘쳐서 좋지 않다던데, 각 잡고 쓰는 글이 아니라 그런가 그냥 새벽 갬성에 취해 마음껏 씨부려볼래요. 오늘도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에세이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을 출간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확인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