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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Feb 13. 2021

엄마에겐 4살 아이 콤플렉스가 있단다

과거는 왜 상상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나


나는 4살 콤플렉스가 있다. 4살 아이를 보면, 가끔 눈물이 멈추지 못하고 흘러나올 때가 있다. 4살은 우리 집이 지방 소도시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 왔을 때 나의 나이이다. 그때부터 엄마가 일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집을 지켰다. 그 시절이다. 그래서 4살 아이를 두고 일을 하러 밖에 떠돌면 본능처럼 마음이 불편해진다. 어릴 때 기억들이 괜히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분명 내가 넘어야 할 산인데 가끔 나는 그 산속에 처박혀 울어버리기도 했다.


그리하여 4살 아이가 주는 상징은 나에게 꽤나 크다. 덮어버리고 싶은 과거이기도 하다. 아니 덮어버리고 싶은 감정이기도 하다. 언니들과 오빠가 모두 학교에 가면, 홀로 남아 빈방을 지키던 기억. 옆방 아줌마가 가끔 나를 들춰보곤 하시던 기억. 혼자서 머리를 감고 찬물에 코를 훌쩍이며 이불속에 들어가 있던 기억. 벽에 낙서를 하던 기억. 둘째 언니가 학교를 마칠 시간에 맞춰 길에 나와 기다리던 기억. 흰 우유를 먹지 못하는 언니가 상온에서 불룩해진 우유를 들고 오면, 마음의 허기에서였던지 우유를 단숨에 들이키던 기억. 그런 기억들이 난다.


이런 기억들은 일생을 두고 복기를 통해 재생산된 기억들이다. 재생산된 기억들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바가 없다. 가족들 모두 각자의 기억 속에서 당시를 기억할 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올해 둘째가 4살이 된다. 아이를 보면서 가끔 어린 나를 상상해본다. 과거는 이제 상상의 영역이다. 상상 말고는 만날 수 없는 시간들이다. 그래서 가끔 부풀려지기도 한다. 감정의 과잉 재생산이 현재의 나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도 안다. 아이를 집에 두고, 일하러 나올 때면 나는 뭔가 허전하고, 불안감을 느낀다. 가끔 집중하지 못하고 멍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둘째는 엄마의 우려와는 달리 아주 잘 지내고 있다. 나의 걱정은 괜한 기우임을 안다. 나의 불안감은 근원에서부터 다시 찾아야 한다. 그 시절의 나는 불안했던가? 4살부터 실체를 알 수 없는 고독과의 사투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인가? 그래서 괜히 둘째도 혹시 나처럼 고독이란 감정을 서둘러 배우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난무한다. 그럴 때면 아이 사진을 본다. 집 안에서 형과 잘 놀고 있는 아이가 웃고 있다. 결국 문제는 나의 감정이다.


사실 내 기억 속의 4살 아이는 슬프거나 기쁘거나라는 감정 표현이 없다. 단지 그 상황에 놓인 것이다. 물론 가끔 대문 밖을 나서는 엄마를 따라가면서 가지 말라고 울면서 고함을 쳤고, 그럼에도 가버리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금세 울음을 그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오빠의 눈빛에서 이해 불가한 표정을 읽고 나면, 또 그렇게 하루가 갔다. 엄마는 다시 저녁에 와서 우리의 저녁을 챙겨주고, 집안일을 하고, 잠에 골아떨어진다. 나와 어떤 시간의 교류를 할 수 없었지만, 엄마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따뜻했던 기억이다. 그래서 당시 기억은 어쩌면 백색 형광등이 아니라, 카바이드 등불 같다. 노란 불빛 사이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하지만 한기가 아닌 온기가 느껴진다. 추운 것 같으면서도 춥지 않았던 이유는 이 역시 재생산된 나의 기억이 주는 환기이다. 스스로 나의 과거를 윤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윤색을 통해 나의 과거가 아프지만은 않았다고 스스로 달래고 있는지도 모른다. 슬픈지만 이것은 진실 같다.


매번 밖에서의 일이 끝나면, 무릎이 아프도록 빠르게 걷는다. 빨리 걷고, 달리고, 서두른다. 괜히 마음이 급해진다. 그래. 이번 일이 끝나면, 반드시 재택 가능한 일을 할 거야 다짐하면서도 매번 번복한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집에 가는 방법을 택해 달린다. 아이는 엄마를 딱히 기다리진 않는다. 자신의 놀잇감에 더 집중한다. 그럼에도 엄마의 마음을 그렇지 않다. 재생산된 내 기억 속 어딘가에서 당시의 진심이라 느껴지는, 실오라기 같은 감정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면 더욱 그렇다.


아이가 4살을 통과하기 전, 나의 4살 콤플렉스에 무감해지기로 했다. 과거에 발목 잡혀 사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과거의 끝에 기억 속 4살인 내가 보인다. 하지만 둘째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더 이상 엄마가 없어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걸 아는 나이다. 그래선지 엄마가 다시 등장했을 때 아이는 따뜻하게 맞아준다. 우리둘의 관계는 그걸로 족하다. 엄마는 이번 일이 끝나면 또 종일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는 지속적으로 불안을 탑재할 이유가 없다. 사실 엄마가 종일 붙어있지 않는다고 아이의 시간이 불행한 건 아니다.


내 인생의 연대기에도 미니멀리즘이 필요한 시점이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자. 버리고 난 후, 다시 채우기로 결심한다. 새로운 내 아이의 4살,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나의 4살 기억들에 어두운 면을 도려내자.  


기억은 어떻게 재생산되는가. 과거는 왜 상상 말고는 불가능한 영역이 되었는가. 가끔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런 생각에 빠진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달콤한 잠에 취하듯 어느 날은, 카바이드 등불처럼 깜빡대는 나의 과거에 취해 갈지자로 걷던, 어떤 시간들. 시간이란 강둑을 쌓아두고, 어느 순간, 와르르르 무너뜨리기도 했던, 어떤 시간들. 이제는 작별을 고한다. 2021년이 시작됐고, 나는 더 이상 과거를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더불어 아이의 감정을 나의 감정과 동일시하지 않을 것이며, 4살이라는 무거운 꼬리표도 이제 떼어보기로 결심한다.


안녕, 나의 시절.

안녕. 나의 4살.

그리고 이제는 상상의 영역이 된 과거여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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