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덕후가 이름을 쓰면 생기는 일
첫째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과 함께 아이에게 주어진 숙제들은 초1이 감당하기엔 조금 버거울 수 있어 보였다. 유치원에 갔다 와서 학원 한 번 가지 않고 내내 놀기만 했던 아이의 경우 더욱 그랬다. 다행히 아이는 스스로 한글을 깨쳤고, 책도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까다롭고 고집 세고 예민한 아이에게 주입식 교육은 도통 통하지 않는 방법이다. 놀이식으로 뭔가를 가르치기엔 엄마의 능력은 부족했고, 코로나 시국에 학습지 교사를 집으로 불러들이기에도 맘이 편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학교에 들어가니 이름을 써야 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종합장에도, 노트에도, 활동지에도, 숙제장에도 이름을 써야 했다. 만들기 과제에도 이름을 써야 했다. 아이는 서툴지만 한 자 한 자 쓱쓱 써 내려갔다. 숙제를 하긴 하지만 마음은 이미 넓적이(넓적사슴벌레 수컷)와 장수풍이(장수풍돌이 수컷)에게 가 있었다. 얼른 숙제를 하고, 아이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과 놀아야 했다. 그래서 글씨는 어찌나 대충 빨리 써댔고, 그러다 보니 틀린 글씨가 속출했다. 지우개로 또 지우고를 반복하며 겨우겨우 그날의 할당량은 해치우고, 늘 그랬듯 온 집안을 들쑤시며 놀았다.
아이가 노는 동안, 학교에서 학습한 활동지를 파일에 넣었다. 갑자기 나는 내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름 공란에 눈에 띄는 글자들. 이럴 수가. 아이가 엄마에게 얘기도 하지 않고 개명을 했다. 그런데 이름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 이름: 하곤충
- 이름: 하사슴벌레
- 이름: 하장수풍뎅이
좋아하는 곤충을 이름으로 썼다. 그런데 어느 날은 또 이름이 바뀌어있었다.
- 이름: 하사마귀
- 이름: 하투구벌레
하하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곤충 덕후로 입문한 지 이제 8개월째에 접어든 첫째. 뇌구조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곤충이다. 처음에는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가 좋다고 하더니 이제는 온 세상 곤충이 다 궁금한 모양이다. 봄이 시작되자 길 가다 멈춰 곤충을 관찰하는 일들이 잦아졌다.
"이름을 왜 곤충으로 한 거야?"
"선생님은 개똥을 좋아하는데 그래서 이름에 개똥을 붙여. 그래서 나도 좋아하는 곤충으로 쓴 거야"
선생님은 아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개똥이를 활용하는 모양이다. 아이의 꿈은 '곤충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수영 사진작가가 관련 책을 가장 많이 냈다. 책을 보면서 아이는 이미 자신을 꿈을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은 이제 도저히 바꿀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유가 뭘까? 물어봤다.
"학교에서 애들이랑 선생님 앞에서 발표했어. 곤충 사진 찍는 사람 되고 싶다고, 그래서 못 바꿔"
얼마 전, 담임선생님과 전화 상담을 했다. 선생님도 첫째가 곤충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이름을 하곤충이라고 해서 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에 깊게 빠지는 게 좋은 것 같다고 하셨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벌써 한 분야에 이렇게 깊게 빠져있다니 좋은 현상 같아요"
8년째 덕질 중인 아들을 키우다 이런 말을 들으니 왠지 위로가 됐다. 지난 시절, 아이가 거쳐왔던 덕질 물품들과 책에 꽤 많은 물량 공세를 했던 부모로서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지난 세월을 보상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남편이 늘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 애는 잘 크고 있어. 부모만 잘하면 돼"
아이는 자신의 세계를 잘 구축하고 있으니, 아직도 사춘기 방황하듯 갈피 못 잡는 엄마만 정신 차리면 되는 건가 싶었다. 결국 세상만사 결론은 늘 하나였다.
"다들 잘하고 있다. 나만 잘하면 된다. 나만 노력하면 된다. 나만 시작하면 된다"
아이를 통해 나는 인생을 알아가고 있고, 늦은 나이에 성장을 꿈꾸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온 세상에 배울 것 투성이라는 것도 이제 인정하자. 겸손의 미덕이 부족한 나에게 아이의 덕질은 많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