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반 처리 담당 엄마의 오류
하교하는 첫째를 만나면, 나는 항상 물어본다.
"오늘은 지구를 구했니?"
매번 물을 때마다 첫째는 못 구했다고 말한다.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못했지만, 내일은 조금 남겨서 동그라미 받을 거라며 의기양양하게 씽씽카를 타고 휘잉 사라진다. 어느 날은 신나게 얘기한다.
"엄마, 오늘 태이가 지구를 지켜서 우리 줄이 가장 빨리 나왔어"
첫째네 반에서는 담임선생님께서 급식 후 음식을 다 먹으면 지구를 구했다고 칭찬을 해주신다고 한다. 점수처럼 책정돼 오늘 하루, 착한 일을 많이 한 분단이 하교 때 앞줄에 서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했다. 아이들은 점점 더 편식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유식 때는 이런저런 채소들을 다 먹었던 첫째도 채소를 즐겨먹지 않는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급식 때마다 아이들의 잔반 처리가 골칫거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
급식 때 매운 음식을 조금씩 먹다 보니 요새 첫째는 약간 매운맛도 맛있다며 먹는다. 세월 따라 입맛도 변하나 보다. 4살인 둘째는 단맛을 좋아한다. 다행히 시금치와 콩나물 등도 좋아해 아직까진 골고루 먹는다. 다만, 사탕과 젤리를 너무 좋아한다는 게 흠이지만.
결론적으로 두 놈들의 입맛은 다르다. 공통적으로 고기를 좋아하는 것을 빼면, 채소와 국을 즐기지 않는 첫째와 두 가지가 다 있어야 잘 먹는 둘째를 위해 음식을 만든다. 나물을 무치고, 미역국을 끓이고, 생선을 굽는다. 한 가지로는 절충되지 않아 이것저것 만든다. 골고루 먹이기 위한 엄마의 사투이다. 솔직히 이 중에서 첫째가 몇 가지를 먹을지는 미지수이다. 둘째는 그날 컨디션에 따라먹는 양에 차이가 좀 있다. 간식을 왕창 먹은 날은 몇 술 뜨지 않고 도망간다.
어느 날엔 음식이 절반 이상 남기도 한다. 그럼에도 엄마는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있는 반찬만으로는 충족되지 않기에 매끼마다 한 가지 또는 두 가지를 추가하게 된다. 조금씩 만든다고 하지만, 반찬통에 매번 반찬이 남아있고, 일주일이 되면, 그릇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는다. 결국 이 잔반들을 꺼내 처리하는 건 엄마담당이다. 남은 반찬들을 모아 밥을 먹는다. 남은 미역국도 데운다. 그렇게 일주일에 하루, 아이들이 없는 오전 시간, 잔반 처리에 들어간다.
문제는 매일 아침, 바쁘게 준비하느라 아이들이 남기고 간 음식들도 많다. 데운 식빵에 잼만 잔뜩 발라놓고 그냥 가버린 둘째의 만행을 처리하는 것도, 그 좋아하던 수박이 당도가 떨어진다며 맛이 이상하다고 다 뱉어버리고 난 후, 접시에 쌓인 수박을 처리하는 것도 결국 엄마의 몫이다. 하지만 먹긴 먹는데 허기가 진다. 아침엔 아이들이 남은 음식들도 배를 채우고, 점심에 냉장고 안의 잔반들도 허기를 채운 날이면 더 그렇다. 기운도 다운된다.
느는 건 뱃살이다. 나이 들어 얼굴살이나 종아리살을 빠지는데, 뱃살은 늘어난다. 보기 싫게 늘어진다. 옆구리로 손잡이가 점점 커지는 것을 막으려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과거 우리네 엄마들의 마음이 되어 남은 음식을 먹게 된다. 명분상 지구를 지키기 위한 임무라 좋게 좋게 생각한다. ㅎㅎㅎ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정말 많이 먹어서 뱃살이 느는 걸까? 뱃살에도 감정이 있는 것 같다. 아침, 점심을 잔반 처리하는 날이면, 뱃살은 더 축축 쳐져있는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은 작은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채우면, 뭔지 모르겠지만 덜 쳐져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뱃살 타파를 위한 걷기 운동을 하고 온 날이면, 탱탱해진 뱃살의 손잡이가 단단해져 있는 것 같다.
기분에 따라 뱃살의 모양도 다른 걸까? 일에 찌들어 피곤한 남편의 뱃살이 곧 터질 듯 빵빵하게 부프러 오르는 걸 보면 마치 심술 난 개구리 볼살 같다. 강제 집콕 중인 나는 자꾸만 쳐지고 쳐져 달리의 시계처럼 시간 앞에서 옆으로 늘어지는 뱃살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나의 뱃살이 좀 더 내 몸 안에 안착되어 군살 없이 원래 형태로 돌아오려면, 내 기분을 자가충전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몸에 활력이 사라지면, 내 몸 안에 장기들이 늘어질 때로 늘어져 나중엔 엿가락 방바닥에 달라붙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용수철의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매일 아침, 나는 도서관으로 탈출하기로 말이다. 아이들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집안일을 하다 보면, 우울함의 주파수가 강력하게 파동을 만들어 나는 점점 옥죄는 기분이 든다. 우울증은 아니지만, 우울감이 자주 찾아오는 나를 위한 극약 처방이다.
집 밖에 나와야 집의 소중함을 알듯, 나를 밖으로 내돌리면, 내 뱃살도 좀 더 부지런해지겠지. 게다가 도서관까지 걷기 운동하기에도 딱 좋은 거리니 나의 친구는 이제 동네 도서관으로 결정하고, 매일 만나러 갈 수 있도록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야겠다.
어찌 됐는 첫날은 성공이다. 내 마음의 허기는 이곳에 채우기로 하고, 뱃살에게도 운동의 기회를 꾸준히 주자. 주말엔 어차피 아이들 때문에 불가능하니 주중이란 시간 동안, 열심히 도서관 친구를 만나자. 가을쯤 되면 좀 더 날렵해진 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