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가 마주한 어둠의 실체는

얼굴인지 그림자인지 모를 큰외삼촌과의 마지막 기억

by 델리러브

만원의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오만 원 지폐의 등장으로 만원의 가치를 떨어졌지만, 그래도 만원은 만원이다. 뭔가 꽉 차 있을 때 우리가 흔히 쓰는 만원 버스처럼. 나 어릴 때는 단일 지폐가 최고액이었던 만원은 그만큼 귀했다. 누구든 쉽게 만원 한 장을 꺼내 용돈을 주지 않았다. 삼천 원, 오천 원 선 안에서 세뱃돈을 받았다. 단, 큰외삼촌만은 빳빳한 만원 짜리 한 장은 어김없이 내게 주셨다. 나는 그 돈을 받기 위해 어쩌면 엄마를 쫓아다녔는지 모른다. 내가 세뱃돈을 받아오면, 둘째 언니가 울먹였다.


"나는 돈 하나 없는데"


그럼 나는 응수한다.

"그럼 따라오든가"


의기양양했던 내게 가장 큰 액수의 용돈을 매번 제공해준 큰외삼촌. 을지로에서 석유와 얼음 배달을 하던 큰외삼촌의 사업은 꽤 잘 나갔다. 을지로 집은 좁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돈 냄새를 맡았다. 석유를 들고 나르던 막내 외삼촌의 뒷모습에서, 우리 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반찬 가짓수도, 외사촌 언니의 방에서 느껴진 뭔가 모를 포근함은 모두 돈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안정된 자본이 불러온 나비효과이다. 물론 사업이라는 불안정한 속성을 내재하고 있지만, 그 집은 있어 보였다.


변변한 카세트 라디오 하나 없던 시절. 큰언니는 카세트테이프로 듣기 평가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엄마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도 외갓집, 큰외삼촌 댁이다. 막내 외삼촌이 쓰던 카세트를 통째로 들고 왔다. 덤으로 송골매 앨범까지 딸려왔고, 이 모든 것들은 호시탐탐 노리던 오빠에게 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정부로 이사를 갔다. 아직도 나는 기억난다. 의정부 2층 집의 기억. 윤종신의 노래 '이층 집 소녀'에도 나오듯 2층 양옥집은 그 시절, 서민들의 로망이다. 그런 집이 바로 외갓집이었다. 집안의 대표로 나는 엄마와 명절을 빠짐없이 방문했다. 마냥 부럽기만 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내색하진 않았다. 명절날, 바글바글 대던 친적들 틈에서 몰래 빠져나와 이층 집 옆 들판을 서성이며 걷기도 했다. 워낙 사람이 많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지만, 나를 들쳐봐 주는 두 사람이 있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이다.


외할머니는 이제 90세 중반을 넘어섰다. 원래는 만석꾼집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고 한다. 문제는 점괘에 외할머니가 가난한 집에 결혼을 해야 장수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가난한 집안과 혼인한 할머니는 말도 못 할 고생을 했다. 외할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시고, 남은 오 남매를 키우시느라 산전수전 다 겪으셨다.


그런 외할머니 곁에서 가장 노릇을 한 사람이 바로 큰외삼촌이다. 그 시절, 어느 집안에나 있을 법한 인물이자 스토리다. 외삼촌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하셨다. 결혼 안 한 동생들 다 시집, 장가보내면서 열심히 사셨다. 하지만 사업이란 항상 굴곡이 있기 마련. 큰외삼촌은 여러 사업을 하신 모양인데 나중엔 하는 족족 망했다. 큰외삼촌의 사업운은 젊은 시절, 대가족을 부양할 때 이미 다 소진한듯하다.


몸도 안 좋아지셨다. 당뇨로 고생했고, 술담배도 많이 하신 모양이다. 큰외삼촌은 결국 폐암 판정을 받으셨다. 그때가 50대 중반이다. 내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했을 쯤이었다. 엄마가 어느 날, 안방 화장대에 우울하게 앉아계셨다.


"큰외삼촌이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너희들이 보고 싶다고 하더라. 병원에 한 번 가봐"


건대입구역에서 내렸다. 해가 스멀스멀 저물었던 것 같다. 건대역 근처에 사는 친구와 괜한 안부 전화를 하면서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 한 쪽에 큰외삼촌이 누워계셨다.


"소형이구나"


" 몸은 괜찮으세요?"


"그래도 이렇게 얼굴 보니 반갑다. 와줘서 고마워"


이런 특별할 것 없는 대화를 나눴다. 큰외삼촌은 분명 내 앞에 있는 구체적인 실체였다. 나의 근황을 물으면서(무슨 일하는지) 잘해보라고 하셨던 것 같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어서 쾌차하세요라는 뉘앙스로 마무리하고 그 자리를 나왔다.


분명 나는 외삼촌을 만나고 왔다. 그리고 그때 기억들은 꽤 선명했다. 하지만 외삼촌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내가 만났던 외삼촌은 실체였으나 내겐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뭔가 외삼촌 쪽으로 음영이 짙게 칠해져 음성만으로 그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던 기분이다. 하지만 병실엔 분명 불이 켜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굴 만난 걸까? 무엇을 보고 온 걸까?


얼마 후, 큰외삼촌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수술 도중 당뇨로 인해 지혈일 잘 안된 모양이다. 엄마와 아빠는 심통해하며 집 잘 지키라고 하고, 삼 일간 장례식장을 지키셨다. 장지까지 갔다 오신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큰외삼촌을 마지막으로 본 날을 떠올렸다. 어둠만이 짙게 깔린 병실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던 외삼촌의 음성. 그게 다였다. 어쩜 그때 이미 큰외삼촌은 생과 사의 경계에서 서성대고 있었던 건 아닌가? 살아있되 살아 숨 쉬지 않는, 생을 이어가되, 그 결이 곱지 않았던.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카들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훗날, 엄마는 그때 너희들(4남매. 따로 가서 만나고 옴 )이 와줘서 큰외삼촌이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고 우리에게 전했다.


고맙다는 말을 베푼 사람 입으로 들으니 뭔가 울컥했다. 분명 고마운 사람은 나였다. 서울 달동네에서 도시빈민으로 살던 우리 집이 그나마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가 되어주신 분이다. 나는 좀 더 애도를 해야 했는데 그땐 죽음이 뭔지 잘 몰랐다. 나중에야 알게 됐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저 멀리서부터 울음으로 가득 차 걸어오시던 외숙모의 흐느낌을. 엄마와 얼싸 앉고 울음을 좀처럼 잠재우지 못하셨던 외숙모의 흐느낌, 그 의미를.


점괘가 맞는 건지 지금 외할머니는 장수를 누리고 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든든한 큰아들도 먼저 보냈지만, 90세 중반의 나이로 몸은 좀 불편해도, 멀쩡한 정신으로 잘 살고 계신다. 외할머니는 여전히 의정부에 사신다. 큰외삼촌이 사업으로 재산을 다 날려버렸을 때 다행히 내가 부러워하던 그 집만은 외할머니 명의로 되어있어, 그나마 집 하나는 건졌다. 최근까지도 외사촌 언니네가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몇 년 전, 업자들에게 몇 억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근처에 길이 생기니 집을 팔라고 꽤 오랜 기간, 업자들이 찾아왔던 모양이다.


팔리기 전, 외할머니는 그 집에 딸린 작은 방에 살고 계셨다. 집이 팔린 후,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냥 씁쓸했다. 막내 외삼촌이 처가살이를 해서 외할머니를 모실 수 없다. 둘째 외삼촌도 모실 수 없는 상황이다. 엄마는 엄마대로, 이모는 이모대로 외할머니를 모실 수가 없다. 무엇보다 오랜 기간, 살아온 터전을 쉽게 뜰 수 없는 나이가 되셨다. 낯선 곳에 적응하다가 치매까지 온 분도 봤다. 외할머니의 노후가 좀 쓸쓸하긴 해도 성격이 밝으신 분이라 잘 버티고 계신다. 큰아이 3살 때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그때 외할머니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렇게 얼굴 보니까 반갑네. 와줘서 고마워"


큰외삼촌이 병실에 있을 때 내게 했던 말과 같았다. 외할머니를 만나러 가야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너무 늦으면 안 될 것 같다. 큰외삼촌처럼 그림자로 바뀌기 전에 찾아봬야 한다. 실체를 확인해야 안도가 될 것 같다.


초겨울의 문턱에 서면, 울음이 차오를 것 같다. 아빠도 외삼촌도 내게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준, 그 기억 때문. 우리는 실체가 확실할 때 자주 만나야 한다. 마음만으론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것이 실천이다. 내 마음속에서 계속 걸리는 게 있다면, 늦었다고 생각할 때 움직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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