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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Jul 13. 2020

비 오는 날, 걸어본 기억이 언제인가

원초적인 감각을 제공하는 것도 엄마의 역할

버스로 2 정거장 거리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아이 유치원이 있다. 실제 버스로 3정거장인데 지름길을 이용하면, 성인들이 걷기에 딱 좋은 거리이다. 하지만 아이가 걷기엔 날씨에 따라 그 상황이 달라진다.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불면 어느 정도 부는지, 아침 기온은 얼마인지, 점퍼를 준비해야 하는지 등에 따라 걷는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이 친구 엄마가 등원에 도움을 주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담을 덜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 친구의 아침 기상이 점점 늦어진다는 것. 보통은 9시 20분까지는 원에 도착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 친구의 기상은 보통 9시가 넘는다. 그러다 보니 같이 늦어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겨우겨우 시간에 맞춰 첫째를 준비시켰다. 그런데 5분씩 만나는 시간이 늦어지자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출발했다. 문제는 그날이 하필 비가 오는 날이었다는 것. 우산과 우비를 준비하고 두 아이와 함께 등원을 했다. 둘째는 아파트 사이에서 몰아친 돌풍에 놀라 엄마에게 딱 붙어버렸다. 웬만한 껌딱지도 이 정도의 접착력을 보이지 않으리. 둘째는 여간해서 나에게 떨어지지 않았고, 나는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론 우산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비가 왔다. 가랑비와 이슬비의 중간쯤의 비였다. 요란하게 떠들어대지 않고, 바람이 마치 풀숲을 스칠 때 나는 정도의 크기가 반복적으로 귀가에 맴돌았다. 경쾌하지만, 경박스럽지 않다. 더디게 와 빠르게의 중간인데 그렇다고 정확한 중간은 아니고, 속도감 있고 리드미컬한 장난감 교향곡 같은 속도로 내려와 땅에 착륙한다. 비는 자신의 몸에 와닿는 우산의 감촉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매끄러운 미끄럼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빗물이 고인 곳에선 또 다른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다. 해가 뜨면, 종말을 맞게 될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는지 비는 내릴 때부터 요란하다. 온몸에서 낼 수 있는 소리의 증폭을 최대치로 켜놓고 질주한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첫째는 후발주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톡 톡 떨어지는 비의 속도처럼 걸어온다. . 아이는 계속 우산에 집중하고, 무엇보다 안전을 강요한다. 



"엄마, 내가 왜 여기 투명한 부분을 앞으로 해서 걷는 줄 알아? 그래야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알 수가 있잖아"



그러다 아이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물은 아이에게 뭔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천변에선 물이 흐르고, 풀들이 흔들리고, 어디선가 새가 운다. 거기에 비까지 내린다. 아이의 귀는 그중 빗소리에 압도 당한 것 같다. 



sov) 톡! 톡! 토도독~~~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손으로 받아낸다. 자체적으로 빗물받이가 된 아이는 이제는 비보다 더 늦게 걷는다. 유치원 정문은 아직도 보이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온갖 소리들이 갑자기 정지 화면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잠깐 멈춰 주위를 둘러봤다. 달리던 차들도 거의 없고, 있더라도 신호 대기 중이다. 세상 속에서 마치 우리 셋만 옹기종기 모여 사는 기분이다.  우리의 아침이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우산 위로 빗소리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아이는 더더더 조용해진다. 잠자리가 날개의 빗물을 털고, 소금쟁이가 점을 찍듯 물 위를 걷고, 송충이가 길로 나와 새로운 여정을 이어간다. 그 순간, 그들의 전신을 비가 촉촉하게 감싸준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라도 하듯 전방위로 촉촉한 폭죽이 터진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셋이 있다. 비가 오는 아침에만 느낄 수 있는 호사였다. 



무사히 큰아이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아이는 내게 당부한다.



"엄마, 비 많이 오면, 우비랑 비 장화 가지고 와"



비의 축복을 받은 아침이었지만, 오후에는 그 축복을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데. ㅎㅎㅎ 이쯤 되니 오늘의 날씨를 다시 확인한다. 비가 안 오면, 큰아이는 실망할 것이다. 지난번 하원 길에서 만난 소나기는 동남아 스콜을 능가하는 위력을 보여줬다. 큰아이는 걷자고 했고, 나는 버스를 타자고 했다. 이따 버스에서 내리면, 그때 우산 쓰고 집 주변을 돌자고 설득했다.  버스를 타고 내리자마자 큰아이의 표정은 이글어져있었다. 비는 그 뒤로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댓발로 나온 나온 입을 달래주기 위해 단지 내 상가의 (굳이 없어도 되는) 무인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으로 달랬다. 



가끔 17층 높에서 아이들과 비를 본다. 하늘도 보고, 비도 보고, 새도 본다. 17층 높이에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지 않아도 된다. 같은 높이에서 그들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특히 비가 오면, 베란다 문을 두드리는 비의 호출에 우리셋은 창으로 달려간다. 그들의 부름에 응답할 자세가 되어있는 이유는, 빗소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차량 등하원이 많아 날씨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비가 오면 집에서 논다. 안에서 논다. 집 마당에서 비가 오면 우산으로 집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면, 온 세상이 평화였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오는 대로, 이런 자연이 주는 원초적인 감각에 마비되지 않으려면, 때때로 아이들을 (자연 속으로) 방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온실 속으로 아이들을 집어넣기 바쁘다. 더불어 우리의 기억들과 시간들도 온실 속에 가둬놓는다. 우리 어린 시절의 다소 거칠었던 감각에 대해서도 아이들은 알 권리가 있다. 나 역시 용기가 필요하지만, 자연을 자연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노력이 필요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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