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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Nov 13. 2020

걷다보면 길이 보이겠지라는 말은 진리

태초에 인간은 운동형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지도 몰라...

어린이집에 둘째까지 보내고 나면, 나의 아침 공식적인 일정은 일단락을 맺는다. 그럼 다시 나와의 시간이 펼쳐진다. 맨 처음엔 무조건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켜는 일정이었다. 급한 일도 있었으니 일단 우수리처럼 떨어진 일들을 정리해야했다. 급급하게 헤치워내는 일정들이었다. 그러다 일단 한 단락 잠시 쉬는 시간이다. 무얼 할까 생각하다 걷기로 했다.



언젠가 일터가 집과 가까웠을 때는 굳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다닌 적도 있었다. 사회초년생 시절이라 서글프게 하루를 마감하고 걸었던 기억도 많다. 그때 집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1안은 탄천을 따라 걷기, 2안은 도로를 따라 아파트 사잇길로 걷기. 오전에는 1안을 따랐다면, 저녁 땐 2안을 택했다. 아파트 따라 걷는 길은 딴길로 새는 재미가 있었다. 걷다가 힘들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탄다거나 중간에 트럭에서 파는 컵볶이를 사먹었다. 영 마음이 심란하면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빨대 꽂아 마시면서 집에 갔다. 그래서 가끔 그 길을 스쳐가면, 그때 20대 시절, 내 방황의 흔적을 가끔 목격한다.


걷기가 내 인생의 화두가 되었던 건 안나푸르나 트래킹이었다. 걷기위해 도전했다. 걷다보면 뭔가 나오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걷다보면 아무 것도 안나온다. 그냥 걷게 된다. 그리고 걷고 난 후 깨닫는다. 그때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 걷다가 깨닫는다. 걷는건 내 심신에 이롭고, 오래 걸으면 힘들다는 것을.



나는 지금도 운전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 등하원도 모두 도보로 해결한다. 힘들 때도 있고, 그냥 차를 구입할까 이런 유혹에 시달렸던 적도 있지만, 그냥 걷기로 했다. 발을 땅에 디디고 사는, 그냥 중력에 의지하면서 사는게 나는 그냥 맘편한 것 같다. 계산하지 않고 걷고,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걷고. 그러게 걷다보면 목적지에 도달한다.



몸이 비대하지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가 몸의 밸런스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태초에 우리 몸은 야생에 맞춰 살도록 설계돼 있었다. 하지만 점점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운동과 멀어졌을 때가 내 생애 가장 우울했던 시기였다. 밤새서 결과물을 만들어야할 때 우리는 불만을 터트렸다. 사육 당하는 것 같다고. 사무실에서 저녁을 시켜먹고, 그러다 추출해지만 야식으로 사다먹고. 먹다 일하고, 일하다 먹으면서 흘려보낸 시간들. 결국 나는 우울했다.



다시 움직여야한다고 생각할 때 요가를 했었다. 나쁘지 않았으나 자유도가 떨어졌다. 그러다 헬스를 했다. 헬스는 나와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했다. 근력 운동 쪽은 근처도 가지 않았지만. 그렇게 내 운동의 역사는 단조롭다.  스포츠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없다. 나는 그저 내 시간을 활용하는 정적인 운동이 좋다. 이때 말하는 정적인 운동이란 나에게 집중하는 조용한 시간을 말한다.


한때 내가 걷기 예찬을 할 때 한 동네 살던 친구가 말했다.


"아무리 걸어도 땀이 안나는데 운동이 되는게 맞아?"



다이어트에 집중하던 친구가 의심을 했다. 그래도 걷다보면 운동이 되는 거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 운동의 역사는 짧고, 긴 역사를 자랑하지 않지만, 다시 걷으면서 정리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오늘은 걷다가 여러 생각이 교차되었다. 첫째가 목이 좀 따갑다고 했는데 괜찮을까? 둘째 어린이집에서 사진을 보내라고 어제 보냈는데 지금 보내도 괜찮을까? 그러다 눈물이 핑돌았다. 시간이 질질 끌려다니면서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자잘하게 신경써야할 일 투성이인데 나는 참 그걸 잘 못해내고 있다는 생각. 또 다시 밀려오는 자책의 시간. 육아에 너무 거리를 두고 있는건지, 일한다고 밀어둔 것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여러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자책하다 다시 걷는다. 바람이 분다. 한쪽에선 도로 공사 중이다. 그와중에 새는 날고, 물은 흐른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향해 걷고, 나도 무의식적인 흐름으로 걷고 있다. 마음을 가다듬는다. 작은 책망들이 모여 나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꽂는 일은 이제 더이상 하지 말자고. 다시 걷는다. 약간 숨이 가파졌다. 마스크 사이로 흰김이 피어오른다. 벌써 겨울 같은 가을이다. 낙엽은 이미 바닥으로 하강했다. 그들은 바람에 날려 또 다른 길 위로 흩어질 것이다. 한 나무에 있던 나뭇잎들의 운명도 결국은 갈리길 마련이다. 지난 시간의 기억들도 점점더 퇴색될 것이다. 뒤돌아본다고 해서 달라질 운명이 아니라면, 앞으로 보고 걷자. 걷다보면 길이 보이겠지라고 나를 위로한다.



지금은 잠시 나란 존재를 밀어둔다. 존재라는게 주관적인 형태로 오롯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 객관성을 확보해야하는 상황이 올 때가 있다. 객관의 존재로서 내가 존재한다면, 어쩌면 여러 역할이 주어진 지금이 아닐까. 엄마로, 딸로, 아내로, 노동자로, 잉여 인간으로 여러 감투를 쓰고 살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나란 존재를 하나로 명명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단순하게 생각한다. 걷다보면 길이 보이겠지라고. 단, 시간의 흐름에 나를 버려두지 않고. 시간의 밀도를 높이자고.



걸으면서 릴렉스해진 나를 발견하다. 집으로 향한다. 다시 나사를 조이듯 내 마음을 조인다. 일단 집안일을 얼른하고, 제안서를 정리하자. 그리고 남은 시간, 나란 존재를 발견하는 시간을 확보하자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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