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엄마에게 덕후아들이 준 선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몸이 안 좋으니 심기가 점점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둘째는 눈치 없이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닌다. 하지만 첫째는 엄마의 마음을 엿보고 있었다. 첫째는 일단 둘째 때문에 오전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엄마가 온전히 받아주지 않으니 뭔가 이상하다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
생리통은 아닌데 생리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다. 졸리고 온몸이 무겁고 예민해진 신경. 이 3가지 증세가 나타나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리고 온갖 것들이 다 신경 쓰인다. 불편한 감정들은 결국 아이들을 겨냥하게 되고, 나는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소리치게 된다. 밥 어서 먹으라고, 그만 어지르라고, 그만 뛰어다니라고. 보통의 남자아이들이라면 일상적인 행동들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식으로 불편한 마음을 밖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그만하라고 하는데, 입은 쉬지 않고 있다. 거울로 비추면 괴물 같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해도 너무 하잖아로 자기합리화를 시키고 있었다.
이때 '괜찮아, 너도 참을 만큼 참았어'라고 나의 화를 더 불러일으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북돋워주는 악마의 유혹, 그 실체는 무엇일까? 최근 나는 이런 생각에 골몰해있다. 나인 듯하면서도 내가 아닌 이 감정 실린 목소리의 주체는 누구일까? 이 목소리는 가끔 내 도전을 가로막고, 가끔 내 감정을 폭발하게 하며, 나란 인간의 참혹한 본성을 드러나게 한다. 어쩌면 객관성을 잃은 내 안의 어두운 감정 찌꺼기들이 아닐까. 감정을 순화시키면서 사회화 중인 인간에게 순화 도중 탈락한 감정들이 모여 불만을 쌓기 시작한다. 그 불만들은 탑이 되어 내 안에 뾰족한 탑을 쌓았다. 그러다 이성과 감정의 줄타기에서 실패한 날, 나는 탑돌이를 하듯 이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악마의 유혹에 빠진다는 스토리. 이 뻔하고도 막장스러운 스토리는 나의 앞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지금은 내 감정에 가장 맞닿아있는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나는 슬쩍 안방 화장대 쪽으로 가서 홀로 앉아있는다. 나의 노골적인 감정들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감정은 스스로 분출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자극을 통해 폭발적으로 반응한다. 아이들의 행동이 눈에 거슬린다면, 나는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상황은 도돌이표처럼 해결되지 못한 채 방황을 한다. 남편에게 얘기하면, 이제 좀 그만하라고 한다. 일상이 그렇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라고. 일상인데 어쩌라는 거냐. 이런 태도였다. 그리고 나의 힘든 육아 스토리는 그만 듣고 싶다고 단언했다. 불행하다는 말도 자꾸 반복하면 진짜 불행해지는 법. 어쩌면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상대방까지도 지치게 하는 얘기라면 그만 판을 정리하고, 속으로 숨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행동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가 본인의 정신 체계를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불완전한 나란 인간은 쉽지 않다.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
결국 나와서 동생과 싸우는 첫째를 말린다. 둘째는 첫째의 손에 들린 모든 게 자신의 것이라 우긴다. 결국 첫째는 화를 내고, 손에 든 장난감을 던진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이 무한 반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아프다. 둘째에겐 같이 노는 장난감이고, 형이 놀고 있었으니 너는 기다려야 한다고 얘기한다. 첫째에겐 방에 들어가 소리치면서 화를 내는 행동을 옳지 않다고 꾸짖는다. 첫째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결국 첫째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둘째는 놀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시 아이를 재우고 나왔다. 첫째를 안아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또 한다. 청소를 하는데, 갑자기 첫째가 나타나 내게 선물이라면서 종이를 주고 간다. A4 이면지였다.
"이게 뭐야?"
"선물"
"어떻게 보는 거야?"
"열어봐"
이면지 사이에 낀 그림을 발견한다. 첫째가 요새 그리고 노는 사슴벌레. 그중에서도 첫째가 가장 좋아하는 넓적사슴벌레이다. 사슴벌레 덕후로 이제 막 입문했다. 나는 아들의 선물을 보고,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라고 얘기하면서 선물을 들쳐보다 아이의 마음을 엿본다. 아이는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빠르게 준비할 수 있는, 본인에겐 가장 소중한 사슴벌레를 그려 내게 선물한 것이다. 그 마음이 예뻐,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잠든 새벽, 냉장고에 붙여뒀다. 가끔 화가 나면, 이 선물을 열어 보면서 마음을 위로하겠노라고. 이렇게 엄마는 오늘도 너에게 진심어린 위로, 그 방법을 배우나보다.
그나저나 아이가 얘기했다.
"엄마 내가 요즘 가장 하고 싶은 게 뭔 줄 알아?
바로 사슴벌레 키우기야. 진짜 사슴벌레를 키우고 싶어"
"몇 마리?"
"한 마리. 수컷으로. 수컷이 멋있어서"
고민이다. 예전에 달팽이 키웠던 거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진다. 엄마는 너희 두 명의 생명체를 키우는 것만으로 벅찬데 여기에 사슴벌레까지 추가해야 하나 고민이 든다. 남편은 키워보자고 하는데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키우게 되면, 나는 어찌해야 하나. 결국 나와 첫째는 2021년을 곤충 일기로 시작하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이 된다. 좀 더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