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zart- Piano Concerto No. 23: II. Adagi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저마다의 색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파란색 같던 사람이 어느 순간 빨간색이 되기도 하고, 선명한 빨간색일 것 같던 사람이 뜻밖에 흰색에 가까운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노란색으로 보이던 사람이 녹색의 결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의 색으로 설명되지 않고, 여러 빛을 함께 품고 살아간다는 것을 요즘 더 자주 느낍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사람을 만나면 자꾸 궁금해집니다. 저 사람의 삶은 지금까지 어땠을까. 그리고 앞으로 써 내려갈 삶은 어떤 이야기를 품게 될까.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품은 채 대화를 나눕니다. 일은 일입니다. 기자를 만나 설명할 것은 설명하고, 제 근황도 전합니다. 그런데 저는 원래 말하는 것보다 듣는 쪽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늘 몇 가지 질문을 생각해 둡니다. 그 질문을 통해 그 사람의 말투와 표정, 망설임과 확신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 기자들에게는 꼰대 같은 질문도 하게 됩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하다가도, 제가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한 호기심을 꺼내며 이런저런 말을 보태게 됩니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나면 문득, 정작 본업인 일 이야기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싶어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삶이 조금 더 풍부해지려면 배움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꼭 하게 됩니다. 시간이 되면 여행도 다니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여기저기 둘러보라고 말합니다. 젊을 때부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직장이라는 틀 안에 오래 머물다 보면 우리는 그 두 가지 질문을 자주 잊고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퇴직을 맞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가족과 어떤 시간을 보내야 할지 한꺼번에 낯설어집니다. 계속 일을 하더라도 머릿속에서는 그 두 질문의 답을 찾는 일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꼰대일 수 있고, 오지랖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질문이야말로 사람이 자기 삶을 잃어버리지 않게 붙잡아 주는 줄이라고 믿습니다.
요즘 저는 아직 쓰고 있는 삶과, 앞으로 써야 할 삶의 이야기를 함께 생각합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핑계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삶이란 무엇일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가족과 함께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행복한 삶일까. 아니면 이한열, 안중근 의사처럼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자신을 내놓는 의미 있는 삶일까. 지금의 제 대답은 전자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국민학생이던 시절의 저에게 물었다면 아마 후자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삶을 마칠 때 “나의 소풍 참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요즘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일을 합니다.
어제는 봄이 시작이라면 삶을 이끌어 가는 동력은 설렘일 것 같다고 썼습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설렘이라면, 기대와 희망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삶의 목적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태도일 것입니다.
요즘 정여울 작가의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를 두 번째로 읽으며 밑줄을 긋고 있습니다. 이 책은 2019년 출간된 에세이로, 상처와 치유, 자기 돌봄의 문제를 정여울 작가 특유의 문장으로 풀어낸 책입니다. 책 속에서 정여울 작가는 장영희 교수의 산문을 읽으며 “사랑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순간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이유였고, 희망은 살아 있는 한 결코 버려서는 안 될 삶의 자세였다”는 뜻을 전합니다. 그 문장을 읽으며 저는 오래 머물렀습니다. 정여울 작가가 사랑과 희망이라고 말했다면, 요즘의 저는 그 두 단어를 설렘이라는 말로 붙잡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설렘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을 다시 앞으로 밀어주는 조용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잊혀 가거나 흐려지는 제 설렘을 다시 찾기 위해 저는 지난 1년 넘게 읽고,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친구와 지인, 기자들을 만나며 조금씩 그들의 생각을 훔쳐 왔습니다. 그렇게 모인 조각 위에 제 생각과 경험도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이제는 그것들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야 삶의 이유가 되는 설렘을 조금 더 분명하게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렘을 기쁨으로, 행복으로, 만족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금 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써 온 삶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써 갈 삶도 사랑하려고 합니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가 1995년에 쓴 마지막 저서 『이게 다예요(C’est tout)』에서 제가 오래 붙잡고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삶을 사랑해.
비록.
여기.
이러한.
삶일지라도.
저는 이 구절을 류시화 시인이 2020년에 출간한 시선집인 『마음챙김의 시』를 통해 다시 만났습니다. 이 문장을 노트에 적어 두고 매일 아침 읽습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 그 삶이 못났거나 부족했거나, 때로는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더라도 앞으로의 삶을 가꾸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앞으로 그려질 삶이 조금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수 있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두 질문의 답을 채워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도 그 질문에 답을 쓰고 있습니다.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한 답을.
오늘의 음악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가장조(K.488)」 2악장 「아다지오(Adagio)」입니다. 이 협주곡은 1786년 작품으로, 2악장은 F♯단조의 드문 색채와 클라리넷이 만들어내는 깊은 음색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제 마음에는, 이 음악이 설렘과 고독이 함께 놓여 있는 시간의 표정처럼 들립니다.
https://youtu.be/j8e0fBlvEMQ?si=XBGmOnRE-wb7nxMz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A장조(K. 488), 그중에서도 이 '아다지오(Adagio)' 악장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숨 쉬던 1786년 빈(Vienna)의 분위기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기는 모차르트 생애에서 가장 화려한 찬사와 지독한 고독이 공존했던, 이른바 '기적의 해'였습니다.
1786년 봄, 빈의 음악계는 모차르트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불후의 명작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이 대성공을 거두며 그는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칭송받고 있었죠. 하지만 화려한 커튼콜 뒤편의 진실은 조금 달랐습니다.
보스턴 심포니(BSO)와 베렌라이터(Bärenreiter)의 역사적 분석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이 시기 극심한 경제적 압박과 더불어 '진정한 예술적 이해'를 받지 못한다는 깊은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대중은 그의 화려한 기교에 환호했지만, 정작 그가 음악 속에 심어놓은 깊은 슬픔과 인간적 고뇌까지는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이 협주곡은 바로 그 화려한 사교계의 중심에서 열린 자신의 예약 연주회(Subscription Concert)를 위해, 스스로를 증명하듯 써 내려간 작품입니다.
이 곡의 2악장이 클래식 음악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바로 그 조성(Key)에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평생 수많은 곡을 썼지만, 전 악장을 통틀어 올림 f단조(F♯ minor)를 채택한 것은 이 아다지오가 유일합니다.
당시 음악 이론가들에게 이 조성은 '깊은 우울과 절망,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을 상징했습니다. 1악장과 3악장이 A장조의 화사한 봄볕 아래서 춤춘다면, 그 한복판에 배치된 2악장은 마치 밝은 대낮에 홀로 마주한 깊은 밤의 심연과도 같습니다. LA 필하모닉(LA Phil)은 이 대목을 "가장 열정적이면서도 풍부한 반음계적 변화를 통해 내면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인 악장"이라 평합니다.
이 곡의 편성에는 모차르트의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습니다. 그는 이 협주곡에서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는 트럼펫(Trumpet)과 팀파니(Timpani)를 과감히 제외했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보에가 아닌 클라리넷(Clarinet)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악기였던 클라리넷의 부드럽고도 어두운 음색은, 첼로의 중저음과 결합하여 이 곡만의 독특한 '내밀함'을 완성합니다. 화려한 외형을 걷어내고 악기들이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실내악처럼 대화하게 만든 이 설정은, 당시 빈의 청중들이 기대하던 '화려한 협주곡'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개인적이고 숭고한 절제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여러 클래식 전문 매체와 언론보도들은 이 2악장을 두고 "모차르트가 가면을 벗고 자신의 민낯을 드러낸 순간"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엘렌 그리모(Hélène Grimaud) 역시 "이 느린 악장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모차르트를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1786년 빈의 공기는 차가웠고, 모차르트의 지갑은 비어갔지만, 그의 영혼은 이 아다지오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 곡은 단순한 협주곡의 한 악장을 넘어, 화려한 세상 속에서 홀로 고독을 견뎌내던 한 천재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진실한 고백입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 아다지오(Adagio)는 고독한 영혼이 세상과 화해해 나가는 하나의 서사시와 같습니다. 엘렌 그리모(Hélène Grimaud)의 섬세한 타건을 따라 펼쳐지는 이 치밀한 전개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1. 고독의 선언: 피아노의 독주(Piano Solo)
곡은 아무런 예고도, 오케스트라의 준비 운동도 없이 곧바로 피아노의 입술을 통해 시작됩니다. 6/8박자의 시칠리아노(Siciliano) 리듬을 탄 이 선율은, 마치 텅 빈 무대 위에 홀로 서서 나지막이 읊조리는 독백과 같습니다. 모차르트가 남긴 유일한 올림 f단조(F♯ minor)의 곡인 만큼, 첫 음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의 온도는 서늘하게 내려앉습니다. 그리모는 이 대목에서 감정을 과시하거나 슬픔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음과 음 사이의 넓은 여백을 그대로 살려내며, 듣는 이를 고독의 한복판으로 조용히 인도합니다. 이 도입부의 '선행하는 고립'이야말로 이 곡이 가진 숭고함의 시작입니다.
2. 대지의 응답과 확장: 현악기의 가세
피아노가 첫 고백을 마치면, 그제야 바이올린, 첼로 등 현악기들이 조심스럽게 응답하며 들어옵니다. 피아노가 허공에 뿌려놓은 파편화된 슬픔들을 첼로가 낮은 음역에서 묵직하게 받아내며 곡에 비로소 '입체적인 대지'를 만들어줍니다. 이어지는 전개는 더욱 신비롭습니다. 피아노가 다시 등장하여 선율을 이어가면, 그 위로 바이올린(Violin)의 가느다란 비단실 같은 음색이 얹히고, 비올라와 다른 현악기들이 층층이 결을 쌓아갑니다. 이는 마치 안개 속에서 사물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나듯, 고독했던 개인이 타인이라는 존재와 조심스럽게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집니다.
3. 관악기의 참여: 위로의 목소리
음악이 중반부에 접어들면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관악기(Woodwinds)들이 대화에 참여합니다. 모차르트는 이 곡에서 오보에 대신 클라리넷(Clarinet)을 선택했는데, 이는 신의 한 수라 불릴 만큼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피아노가 잠시 숨을 고르며 물러나면, 클라리넷과 바순(Bassoon)이 주도권을 이어받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 대목은 보스턴 심포니(BSO)나 베렌라이터(Bärenreiter) 등 공식 분석 자료에서도 '목관악기들의 비중이 돋보이는 실내악적 구성'으로 극찬받는 지점입니다. 다시 돌아온 피아노가 관악기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은, 마치 고독한 영혼이 숲속의 지혜로운 새들과 다정하게 문답을 나누는 듯한 평온함을 줍니다. 피아노가 질문을 던지면 관악기가 따뜻하게 답하고, 서로의 소리를 밀어내지 않으며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이 대화는 슬픔을 넘어선 어떤 거대한 위로와 숭고함을 선사합니다.
4. 연주자 소개: 절제의 미학
엘렌 그리모(Hélène Grimaud): 그녀의 연주는 소리를 인위적으로 확장하거나 감정을 밖으로 터뜨리지 않습니다. 음악이 가진 본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집중하며, 템포를 서두르지 않고 일정하게 가져갑니다. 감정을 안으로 깊게 갈무리하는 그녀의 태도는 '진심(Sincere)'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녀의 손끝에서 모차르트의 고독은 가장 투명한 빛을 발합니다.
라도슬라프 슐츠(Radoslaw Szulc)와 바이에른 방송 실내 관현악단(Chamber Orchestra of the Bavarian Radio): 지휘자 슐츠는 어느 한 파트가 앞서 나가지 않도록 완벽한 균형을 유지합니다. 특히 관악기 파트의 섬세한 뉘앙스를 살려내어 피아노와 대등한 위치에서 호흡하게 함으로써, 이 협주곡을 가장 수준 높은 실내악의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들은 피아노와 관악기가 나누는 이 내밀한 대화를 가장 투명하고 단단한 배경으로 받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공기도 여전히 차갑습니다. 해가 떠도 바로 따뜻해지지 않고, 손끝은 먼저 계절의 잔상을 느낍니다. 하지만 하늘은 맑고, 낮으로 갈수록 기온은 조금씩 올라 가겠죠. 완연한 봄이라고 말하기는 이르지만, 그렇다고 겨울이라고 부르기에도 머뭇거리게 되는 날입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 아다지오는 바로 그런 시간과 잘 어울립니다. 다 끝난 것도 아니고, 다 시작된 것도 아닌 시간. 아직 마음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앞으로 가 보려는 마음만은 놓지 않는 시간입니다. 피아노가 먼저 조용히 문을 열고, 현과 관이 차례로 말을 보태는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사람의 삶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혼자 감당하던 시간이 있고, 누군가의 말과 표정이 들어와 그 시간을 조금 바꾸는 순간이 있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Seien Sie geduldig gegen alles Ungelöste in Ihrem Herzen und versuchen Sie, die Fragen selbst lieb zu haben…(당신의 마음속에 아직 풀리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해 조급해하지 말고, 그 질문들을 사랑하십시오”라고 썼습니다.
이 문장은 정답을 빨리 찾으라는 말보다, 질문을 오래 품고 살아가라는 쪽에 더 가깝게 읽힙니다. 오늘 아침 저는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삶의 답을 다 알지 못해도, 아직 쓰는 중인 삶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차갑지만 봄은 오고 있고, 아직 다 알지 못하지만 삶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그 사이를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지금까지 써 온 삶과 앞으로 써 갈 삶을 함께 사랑해 보려고 합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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