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ea Bocelli & Hellwig - L'Abitudine
따뜻한 봄날, 우리는 복국을 앞에 두고 모였습니다. 이름은 거창하지 않게 ‘홍백(弘白)’이라 지었습니다. ‘홍보 임원 출신 백수’들의 모임. 나이가 가장 많으면서도 여전히 현역에서 일하고 있는 한 선배의 제안이었습니다.
사실 오늘은 한 사람의 귀환을 맞이하는 자리였습니다. 소위 ‘학교’라 불리는 곳에서 1년 반의 시간을 보내고 온 형님이었습니다. 몇 해 전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사건 속에서, 회사의 대관과 언론 대응을 맡았고 그 과정에서 법의 책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와 오너,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서 움직였던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꾸만 주어의 자리에 ‘나’를 넣어보게 됩니다. 홍보라는 일이 그렇습니다. 조직을 위해 움직이지만, 그 경계가 언제 개인의 책임으로 넘어오는지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국내 기업 커뮤니케이션 현장에서도 이 문제는 반복적으로 언급되어 왔습니다. 특정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 일을 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대입해보게 되는 종류의 이야기입니다.
식탁 위에는 부재가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동갑내기 한 명은 지지난해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또 다른 한 명은 항암 치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는 더 미루지 않고 모이게 되었습니다. 오지랖이 넓은 내가 먼저 연락을 했고, 언론사 행사에서 만나 이어진 인연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나에게 그들은 친구이고, 동료이며, 같은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입니다.
학교를 다녀온 형님은 예상과 달리 표정이 밝았습니다. 회사에서 고문직을 유지해주어 급여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 분은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고 있고, 한 분은 여전히 홍보실장으로 현직에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는 다르지만,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요즘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퇴직을 앞둔 시간, 혹은 이미 그 경계에 들어선 상태에서 무엇이 달라지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먼저 그 과정을 겪은 사람으로서 몇 가지를 말했습니다. 임원으로서 익숙했던 일들이 현실에서는 낯설어지는 순간들입니다. 통장을 만드는 일, 지역의료로 바뀌면 해야 하는 일, 동사무소에서 서류를 받는 일 같은 것들입니다. 직장에서는 누군가가 처리해주던 일들이, 혼자서는 생각보다 오래 걸립니다.
가족의 태도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이제 쉬어라”라는 말을 듣지만, 그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몇 달이 지나면 집 안에서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세대가 공통적으로 겪는 변화이기도 합니다.
지갑도 달라집니다. 직장에 있을 때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카드를 법인카드처럼 쓰게 되고, “내가 살게”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한 형님은 지난달 카드 사용액이 800만 원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체면이 구겨져도 절대 '내가 살게'라는 말은 먼저 하지 마세요. 이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제 말에 다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는 복국의 마침표인 죽을 먹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예전에는 정치 이야기로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날은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집에만 있지 말라고 했습니다. 도서관이든 스터디카페든, 출근하듯 나갈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가족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스스로의 리듬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홍보임원으로서 몸에 배어 있던 익숙함을 내려놓는 일, 그리고 혼자 처리하고 책임지는 일상을 다시 익히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입니다. 이제는 뒤에 조직이 없습니다.
우리는 봄이 한창일 때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게 됩니다. 각자가 짊어져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게를 나누기 위해, 우리는 이 모임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https://youtu.be/SXNMvxDTAWw?si=xO4qcSmUUJORFb0d
현관문을 나서면 가장 먼저 눈길이 머무는 곳이 있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서늘함 속에서도 기어코 꽃망울을 터뜨리려 준비하는 목련의 기척을 살피는 일. 요즘 제 아침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계절이 바뀌는 찰나의 순간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오래된 친구의 안부를 묻는 것처럼 익숙하고도 설레는 일입니다.
오늘 아침, 그 목련의 순백을 닮은 정결하고도 깊은 울림을 가진 곡을 가져왔습니다.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와 헬레나 헬윅(Helèna Hellwig)이 함께 부른 'L'Abitudine(익숙함)'입니다.
이 곡은 2004년 발매된 안드레아 보첼리의 앨범 'Andrea'에 수록되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흔히 '익숙함'이라 하면 권태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곡은 그 반대의 지점을 노래합니다.
이탈리아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작곡가 주세페 페리스(Giuseppe Furrizz)와 작사가 피에르파올로 구에리니(Pierpaolo Guerrini) 등이 협업하여 탄생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흘러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랑, 즉 '습관(Habit)'처럼 내 곁에 존재하는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보첼리는 클래식과 팝을 넘나드는 '팝페라'의 정점에 서 있었습니다. 이 곡은 화려한 고음보다는 중저음의 편안함과 서정성을 강조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곁을 지키는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 곡은 안드레아 보첼리를 위해 만들어진 곡입니다. 보첼리의 묵직하고 깊은 음색이 곡의 주제인 '오랜 시간 쌓인 사랑의 무게'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율의 흐름: 기타 줄 위에서 일렁이는 일상의 온기
이 곡은 화려한 오케스트라로 압도하기보다, 아주 소박하고 친밀한 소리로 시작됩니다.
어쿠스틱 기타의 정서: 곡을 여는 것은 첼로가 아닌, 나일론 줄을 사용하는 클래식 기타의 따뜻한 아르페지오입니다. 기타 줄을 퉁길 때마다 느껴지는 손가락의 마찰음과 부드러운 울림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처럼 친밀합니다. 화려한 기교 대신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는 이 기타 선율은 곡의 주제인 '익숙함(습관)'을 청각적으로 가장 잘 구현하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레이션의 조화: 기타가 차분하게 기틀을 잡으면, 그 위로 옅은 현악 앙상블이 안개처럼 깔립니다. 보첼리의 목소리가 힘을 얻을 때쯤 피아노와 베이스가 가세하며 감정의 파고를 높이지만, 끝까지 '기타'라는 핵심 악기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곡의 소박하고 담백한 미학을 유지합니다.
상상의 풍경: 음악을 듣고 있으면 해 질 녘 토스카나의 어느 집 앞마당, 오래된 나무 아래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풍경이 떠오릅니다. 거창한 무대가 아니라, 손때 묻은 악기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상의 사랑'이 그려지는 것이죠.
가사의 울림: 삶이 된 사랑
이 곡의 가사는 사랑을 거창한 운명이 아닌, 매일의 일상으로 묘사합니다.
"L'abitudine di te, del sapore che mi dai..."
(당신이라는 습관, 당신이 내게 주는 그 맛...)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은 "사랑은 단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서로의 존재를 당연하게 감사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공기처럼 늘 곁에 있어 잊기 쉽지만,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이 곡이 말하는 'L'Abitudine'의 본질입니다.
노래하는 이들: 천상의 화음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 설명이 필요 없는 이 시대 최고의 테너입니다. 보이지 않는 눈 대신 마음의 눈으로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진심(Sincerity)이라는 울림을 줍니다.
헬레나 헬윅(Helèna Hellwig): 독일 출신의 신예였던 그녀는 보첼리의 선택을 받아 이 곡에서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보첼리의 깊은 첼로 같은 저음과 헬레나의 바이올린 같은 고음이 만났을 때, 비로소 곡은 완벽한 균형을 이룹니다.
아침 공기가 여전히 찬 기온이 남아 있습니다. 따뜻해졌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차갑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온도입니다. 현관을 나서며 목련이 피었는지 확인하는 일이 요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복국 자리에서의 이야기가 길게 남습니다. 돌아온 사람, 비어 있는 자리,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가야 할 시간까지 한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각자에게 필요한 말을 조금씩 꺼냈고, 그 말들이 서로에게 남아 있습니다.
헤어지고 난 뒤,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오래 보게 됩니다. 그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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