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돈 ‘나의 쓸모’

- 아침에 받은 불합격메시지, 이번만이 아닌 익숙한 메시지중 하나인데..

by 메이슨
7ce5add6-cd5c-4e44-8bb1-c3c3054604bc.png

햇살이 좋았다.

아침 바람도 좋았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지난 1년 동안 나에게 자리를 마련해준 회사 사무실로 향했다. 버스 안에 앉아 바흐(Bach)의 「아리오소(Arioso)」를 들었다. 조용한 선율이 귀에 머물고 있을 때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메시지를 열었다.

“안타깝게도 불합격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만 읽고 닫았다.


이제는 덤덤해질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두 번 받은 소식이 아니었다. 크게 억울하다는 생각보다, 내 나이가 이제 환갑에 가까워졌으니 기회가 줄어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씁쓸했다.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버스에서 내려 매일 들르던 스타벅스에 갔다. 사이렌오더로 미리 주문해둔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가방에 넣고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는 직원 두 명이 나와 있었다. 남은 직원들은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었다. 직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노트북을 열고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었다. 나는 간단히 목인사를 했다. 내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다과 선반으로 가서 종이컵 하나를 들고 돌아와 앉았다.


노트북을 열고 메일을 살폈다.

직원들이 기자들에게 보낸 보도자료가 전달되지 못했다는 메일, 클라이언트에게 자료 초안과 광고·협찬 일정, 신제품 홍보 방향을 보고하는 메일들이 읽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하나씩 읽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늘 있는 업무의 흐름이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유튜브를 열었다. 미국과 이란의 긴장 상태, 호르무즈해협 봉쇄 소식, 쿠팡의 로비로 미국이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그런데 내 머릿속은 아침에 본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묶여 있었다.


왜지.

왜지.

왜지.


계속 그 생각만 했다.

나이 때문일까.

평판조회에서 전 직장의 평가가 좋지 않았을까.

아니면 원래 나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일까.


생각은 자꾸 좋지 않은 쪽으로 갔다. 그동안 내가 여러 직장에서 일해온 방식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내가 너무 급했나. 내가 너무 강했나. 내가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했나. 내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나.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전무님?”

직원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불렀다. 여러 번 부른 모양이었다. 나는 뒤늦게 “네?” 하고 대답했다. 직원은 미소를 지었다.


간단히 된장찌개를 먹었다. 직원들에게 커피를 사주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유튜브에서 음악을 틀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침보다 더 깊은 생각이 올라왔다.

나의 쓸모가 사라진 것 아닐까.


쓸모.

쓸모.

그 말을 머릿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처음에는 직업 안에서의 쓸모를 생각했다. 회사에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조직에서 내가 더 이상 쓰임을 얻지 못한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이미 몇 차례 겪은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가족 안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가족에게도 나는 쓸모가 없는 사람은 아닌가.

남은 삶에서 나의 쓸모가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데까지 생각이 내려갔다.


바닥까지 떨어졌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지난해 퇴사한 뒤 여러 번 불합격 메일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 메시지는 유난히 가슴이 아팠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같은 문장인데도, 이번에는 더 깊이 들어왔다.


누구에게 아프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하고 하소연할 사람이 없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나는 원래 혼자인 시간이 많았다. 책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여행을 갈 때도 혼자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아주 낯선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외로움이 조금 더 날카로웠다.

심장 가까운 곳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행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을 쐬러 다녀와야겠다.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어딘가를 가야 할 것 같았다.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질문만 하고 있으면, 나는 계속 더 아래로 내려갈 것 같았다.


나는 나의 쓸모를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해왔나.

나는 처절하게 노력해서 무언가를 쟁취하려 한 적이 있었나.

그런 질문도 떠올랐다.


하지만 곧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그보다 먼저, 나는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어쩌면 그것이 더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갖기 위해서라도, 어디든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사무실에서 잠이 들었다.


발자국 소리, 짐을 챙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직원들이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간단히 인사하고 그들의 퇴근을 응원했다.


나도 이어폰을 빼고, 접어서 가방에 넣고 사무실을 나왔다.

거리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 연기를 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있었다.


왜지.

여행을 가자.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생각을 하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30대 때는 과장이 되고 싶었다.

40대 때는 부장이 되고 싶었다.

50대에 들어서는 임원이 되고 싶었다.

그 목표를 위해 밤낮없이 일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입사 동기들은 아직 첫 직장에 남아 정년을 채우고 있다.

나는 왜 퇴사했을까.

당시의 나는 퇴사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믿었다. 내 길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직을 떠나는 일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그것이 나다운 결정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믿음이 조금 흔들렸다.

동기들보다 몇 년 빨리 부장으로 승진했던 나에게, 당시 상관이던 부사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빠르다고 승리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 승리한 것이다.”

그 말이 오늘은 더 아프게 돌아왔다.


그때는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말이 지금 내 안에서 오래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또 묻고 있다.

왜지.



#나의쓸모 #일상에세이 #외로움 #직장생활 #인생후반전

작가의 이전글고독한 마음이 즉흥으로 빚어낸 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