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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Oct 12. 2020

눈물이 많아서 불편해(울보 공대여자)

24화. 울지 좀 말자 (공대여자 말고 그냥 나)

출처 : unsplash(Pim Chu) 


나는 지독한 울보다. 눈물은 나를 종종 난감하게 만들거나 자주 부끄럽게 만들었다. 울어야 할 때는 쉽게 울었으며 울고자 할 때도 역시 쉽게 울 수 있었다. 문제는 울지 않아야 할 때도 쉽게 울었으며 울면 큰일 나는 상황에서도 역시 쉽게 울었다. 이쯤 되다 보니 나의 눈물은 뇌를 거쳐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긴장하면 손에 땀이 많이 나는 사람들과 같은 정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다한증의 경우 증상 완화를 위한 치료법이나 시술이 있다고 하던데. (평소 손으로 나가야 하는 땀을 억제하면 그만큼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등에서 땀의 양이 훨씬 늘어난다고 들었다. 물론 확인이 필요한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나의 눈물은 어찌하면 멈추게 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상대방의 미간이나 인중을 보는 것이라고 들었다. 또는 야한 생각을 하는 것도 예방법 중에 하나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나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악영향을 미칠 정도의 상황에서 주책맞게 흘러버리는 눈물은 위의 3가지 예방법이 모두 통하지 않았다. (딱 한 번 결혼식 때 인중을 보는 방법이 유효했다.)


초등학교 때의 공대여자는 성인이 된 지금보다 100배는 더 많은 눈물을 가지고 있었다. 화가 나는 일이나 억울한 일이 있으면 말로 표현할 만큼 시간이 부족해서 였던 것 같다. 딸 셋에 아들 하나인 집에서 빠르고 효과적으로 감정을 전달 해야 하니까. 그리고 뭐니 뭐니해도 가장 피해자처럼 보일 방법은 눈물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내 인생 첫 번째 생존수단으로 '원하는 때에 울 수 있는 능력'을 주로 선택하여 애용하였다. 나의 이러한 습관은 결국 학교에서 울고 싶지 않은 때에까지 우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일어나서 책을 읽어보라고 시키는 상황이 그중 하나였다. 


동시나 산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국어책이 자극적인 슬픔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나, 그 시절의 나는 국어책을 낭독할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눈물이 운 좋게 눈알 아래쪽에 맺혀있게 되면 낭독을 마치고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서 눈물이 눈알로 복귀하기를 기다렸다. 짝꿍이나 선생님이 말 시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러다가 정말 운이 좋지 않은 날에는 눈물이 알알이 맺혀 볼따구를 타고 흘러버렸다. 눈물을 손바닥이나 옷소매로 훔치게 되면 짝꿍이나 선생님이 눈치챌 게 뻔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책을 보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졸린 척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볼따구를 옷소매에 마구 비볐다. 이럴 때는 얼굴을 적당히 가려주는 단발머리가 참 편하다.


초딩 공대여자가 쑥쑥 자라 여중과 여고에 갔을 때는 비교적 눈물에 관대한 친구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울고 싶을 때는 맘껏 울었고 웃고 싶을 때는 맘껏 웃었다. 살도 잔뜩 찌고 여드름도 얼굴을 가득 채웠지만, 꺄르르 거리거나 엉엉거리는 우리를 보고 선생님들은 참 예쁠 때라고 했다. 사실 이 부분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친구들 대부분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 그나마 지금이 낫다고 서로에게 이야기해주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자유로운 감정을 넘나들던 내가 토목을 전공하게 되면서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첫 회사의 입사 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는 현재 나의 처지가 너무도 비관적이라는 것이 사로잡혔다. 한 차례 시험에 떨어진 후 12개월을 한 바퀴 더 돌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겨우 최종 면접 기회를 다시 한번 잡게 되었다. 나는 남자들뿐인 경쟁자들 사이에서 더 강해 보이려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면접에 참석했다. 괜히 급한 마음이 들어 시키지도 않은 마지막 멘트를 하는 중에 펑펑 울어버렸다. 운이 좋게 합격했지만, 중학교 때 코피가 많이 나서 콧속을 지져버렸던 의사 선생님처럼 눈물샘을 지져주는 의사 선생님도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눈물로 인해 본격적으로 난감해진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첫 회사에 입사 후 나는 토목 현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그 현장에 근무하는 1년 6개월의 기간 동안 총 4번을 크게 울었다.


처음은 부서장이 음담패설을 했을 때, 두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현장 직원들에게 무시당하는 내 처지가 한심하고 놀랍고 두려워서였다.


사정은 이러했다. 부서장의 음담패설은 당시의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어서 한번 울고 말았을 뿐이었다. 이 부서 말고 다른 곳으로 옮기면 저런 놈이 부서장이 아니길 바라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수가 없었다. 


음담패설 보다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내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나는 26살의 나이로 발주처의 막내 직원이자 유일한 여직원이었다. 공사 현장에서는 막내 발주처 감독을 새끼 감독이라 부르면서 길들이기를 한다는데, 내가 딱 그 경우였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여자 감독이니 조금씩은 봐주면서 알아서 예우해줄 것이라 기대했었다.


한번은 우리 시공사의 품질 담당 과장과 현장 관리 문제로 언쟁을 하게 되었다. 감독 중에서 그나마 제일 한가했던 나는 선배들이 일일이 챙기지 못한 자질구레한 품질 관련 업무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초보 감독이기도 했고 처음 담당하는 현장이었던 탓에 "시방서와 다릅니다." 또는 "도면과 다릅니다." 그도 아니면 "내역서와 다릅니다." 하며 좀처럼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 융통성은 차장님이나 팀장님이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지 나는 욕먹더라도 그대로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니 한번은 품질 담당 과장이 나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그렇게 잘 알면 니가 직접 시공해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네? 과장님 뭐라고 하셨나요?" 그는 쓰고 있던 안전모를 벗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쌍욕을 하고 사무실로 복귀해버렸다. 나를 혼자 현장에 두고 말이다.


다행히도 운전면허가 있었던 때라 혼자서 운전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현장에서부터 사무실까지 울면서 걸어와야 했을 테니까. 현장에서 사무실로 복귀한 나는 안전화도 갈아신지 못한 채 화장실로 직행했다. 화장실 변기 뚜껑 위에 동그란 등을 하고 한참을 울었다. 부끄럽지만 그때 나에게 처음 들었던 감정이 "무섭다"였다. 당시 친구들과 회사 선배님들에게는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난다. 내가 더 많이 공부해서 FM이 뭔지 제대로 보여줘야지!" 했지만, 나는 그날 나에게 화가 난 성인 남자가 쌍욕을 하며 화를 마구 냈던 그 상황과 장면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 개인과의 오해가 풀리길 기대하거나 상대방의 사과는 바라지도 못했다. 단지 그날 이후로 현장에 나가면 현장 직원과 단둘이 있게 되는 상황이 겁이 났다. 


내가 우리 직원 중 가장 우스워 보인다는 사실은 당분간은 변함없을 테고. 최소 10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이 사람들을 말로도 이겨볼 수 없는데.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이 또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공대여자 울었어? 눈이 왜 빨개?"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고 나온 나에게 차장님이 물었다. 여기에서 미리 설명하지 못했던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나는 눈물이 많다는 단점과 더불어 두 가지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하나는 눈물이 눈알에 고여있다가 흡수되기만 해도 토끼 눈이 된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슬프고 억울할 때 누가 말을 시키면 목구멍에서 '꺼억 끄억 뜨윽' 하는 소리가 나서 제대로 말을 못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눈물이 나면 목구멍이 무지 아프다.


"아니요 그궤 아니롸 끄억 윽윽" 얨병할 나는 그렇게 고자질쟁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 품질 담당자는 다른 현장으로 발령받기에 이르는데. 문제는 어디에서건 간사한 사람이라는 것들은 그 조직의 가장 약한 놈이 누구인지를 가장 먼저 탐색한다고 하지 않은가. 그다음에는 후임으로 온 품질 담당자가, 그다음으로는 그 현장 직원 중 가장 막내 대리가 나에게 쌍욕을 하기에 이르렀다. 


비슷한 일이 3번 정도 반복되다 보니 이제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본디 내 방은 더럽게 치우지 않아도 꾸미고 다니는 일에는 관심이 퍽 많았던 나였다. 예쁜 기지 바지를 입고 현장에 가야 뭔가 더 전문적인 감독인 것 같고 함부로 할 수 없을 것 같고 뭐 그런 것 같은 착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3연타 쌍욕을 직원들에게 듣고 나서는 비가 오고 난 뒤 질척해진 현장을 무섭지 않은 척 앞장서 들어가거나 흙먼지가 마구 날리는 현장에서 고개 숙이지 않고 모래바람을 견딘다거나 김영란 법이 없을 때라 현장 직원들과 회식을 하게 되면 마구 쏘맥을 말아 그들 앞에서 과시하듯이 마셔댔다. 사실 이런 방법 말고는 내가 세 보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매일 고민했다. 


그렇게 애쓴 것 치고는 너무 많이 울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현장에서는 직속 상사가 그 누구 못지 않은 빌런이기에 현장 직원들 눈치는 보지 않았다. 문제는 직속 상사와 술을 한잔 기울이며 풀어갈 수 있는 듯한 일들도 이야기를 꺼내면 눈물 바람부터 할 것 같아서 꺼내 보지 못하고 퇴사를 했다. 회사에 퇴사를 결정하고 통보할 때는 물론 울기에는 너무 많이 화가 나 있는 상태라 다행히 눈물 없는 대화가 가능했다. 어찌 보면 나의 눈물샘이 완전히 눈치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지방에서 4년 이상을 근무한 후 두 번째 직장 생활은 서울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지방 현장 직원들과 동료들 특유의 강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분위기에 익숙해진 나는 서울에서 담당하게 된 현장의 직원들은 베이비 파우더와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뽀송하지만 할 일은 한다고 해야 할까. 일단 서울말을 쓰니까 어느 정도 강한 이야기를 해도 논리적으로 들리는 듯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루는 두 번째 회사 입사 1년 차 때였다. 그날은 건물철거 후 안전을 위해 일부 구간의 흙 되메우기를 시행하는 날이었다. 흙 되메우기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덤프로 조금씩 흙을 부어가면서 다짐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 시방서상에는 30cm마다 한 번씩 기계 다짐을 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토목 감독 5년차의 융통성을 발휘하더라도 현장을 확인해보니 마구 들이 붙고 있는 모양새가 심각해서 현장 소장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에서 흙 받는 것 멈추세요. 다짐은 어느 정도 하셔야죠. 안 그러면 금일 공사하기 어려우십니다." 그랬더니 현장 소장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그럼 어쩌라는 거에요. 그럼 직접 하시던가." 하고 사무실로 돌아가 버린다.


감독 1년 차에는 내가 너무 답답하게 막혀있는 사람이라 그런다고 하지만, 지금도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생각하니 앞날이 막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무실에 따라가서 소장에게 다시 따질 용기가 없었다. 현장 밥을 많이 먹은 우락부락한 상대에게 감독으로써 이야기하는 게 먹히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힘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다른 남자 선후배님들이야 그도 안되면 쌍욕이라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싸울 수도 있고 담배를 태우며 이랬고 저랬고 푸념을 들어줄 수도 있는데 "나는 할 수 있는 게 뭐지?" 하는 무력감이 들었다. 


살면서 성인 남성과 얼굴을 붉히며 욕을 들을 날이 많지 않은 게 정상 아닌가. 나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한번 나에게 저렇게 소리를 질러버리는 사람을 내가 다시 웃으며 대할 수 있을까. 이제 앞으로 어떤 일에 대해서 요청할 때 저 화난 표정과 소리 지르는 목소리가 계속 귀에 맴돌 텐데. 나는 역시나 이런 현장에 적합하지 않은 백해무익한 인물이라는 결론까지에 이르니 눈물이 나와버렸다. 


그렇게 나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해볼 틈 없이 마구 흘렸다. 오전에 있었던 그일 이후 나는 늦은 오후쯤 현장에 다시 나갔다. 


토목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고 내가 그 상태로 숨어버리는 건 더 싫었기 때문이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다시 현장에 나갔는데 현장 소장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감독님. 제가 먼저 찾아갔어야 하는데.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에고 제가 감독님을 울려버렸네요. 울고 오셨구만요?" 


정말 개새끼였다. 


나는 정말 내 눈물샘을 지져줄 의사 선생님이 필요하다. 


그 사건 후 지금까지 4년을 더 일하면서 현장 직원 때문에 우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실망하면 상처받을 만큼 말을 많이 섞지도 않는다. 처음 현장에 발령받아 배치된 현장 직원들과는 통성명만 하고 사견을 최대한 배제한 채 업무 협의를 한다. 




물론 눈물샘이 완전히 마르지는 않았으니, 현장 직원들 앞이 아닌 회사 동료들 앞에서 나는 여전히 몹쓸 울보였다. 


한번은 기술직, 행적직, 미화직, 청경직 등 직급이 나와 비슷한 직원들이 저 위의 높은 분과 간담회를 한 적이 있었다.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직급과 직렬을 소개했다. 저 위의 높은 분은 소수 직렬인 토목직도 있던데 한 말씀 해보시라고 하셨다. 편하게 평소 생각했던 것을 이야기하라고. 


후임이 먼저 손을 들까 봐 내가 손을 들고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략 이러했다. "우리 직원들은 모두 배울 만큼 배우고, 일하는 것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행정직 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하고,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높은 분들은 그분들의 노고를 높게 평가해주지 않으시는 것 같다. 자긍심을 가지고 본인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직원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주시라."


그런데 나는 첫 문장을 채 끝맺기도 전에 둘러앉아 있는 수십 명 앞에서 울어버렸다. 더 최악인 것은 울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마치고 싶어서 엉엉 끄어엉 울면서 꺽꺽 거리면서 밉상스럽게 이야기를 했다는 거였다. 


오늘 아침, 산책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데 1년도 훨씬 지난 그 날의 일이 생각나는 바람에 화장실에서 고개를 감싸 안았다. 때로는 잊고 싶은데 잘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다. 


그날 간담회를 마치고 평소 얼굴만 알고 지내던 청경 한 분께서 나에게 와서 인사를 하셨다. "공대여자님. 말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 정말 감동적으로 다 전달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때로는 나의 의도가 다른 사람에게 다 전달되지 못해서 속상할 때가 많다. 반면에 다 전달되지 못해서 속상해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느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든다. 


내가 강한 척하지 않아도, 눈물샘이 때로 눈치 없이 열리게 돼도.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아직 탈 토목을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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