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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Oct 13. 2020

면피의 면피를 위한 일

25화.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공대여자 말고 그냥 나)


"민원인이 오시면 꼭 따뜻한 차를 먼저 내어드리도록 해. 사람은 따뜻한 차를 마시면 마음도 조금 녹거든."


내 인생 첫 상사였던 주 차장님의 말씀이다. 차장님은 아무리 화가 난 민원인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응대하셨다. 이제 막 병아리 신입이었던 나는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엄마를 따라다니듯 차장님이 무슨 회의에 들어가시건 업무 노트를 들고 쫓아다녔다. 민원인들은 자주 소리를 지르고 종종 욕을 했다.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담당자 나와아아아아!" 하고 민원인이 고함을 지르면 차장님은 항상 자리에서부터 등을 구부려 민원인에게 인사를 하면서 다가갔다. "에고 선생님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시다니. 고생하셨습니다. 이곳까지 들르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우선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차장님의 뒤에 조금 물러서서 눈치를 보던 나는 업무 노트를 들고 탕비실로 가서 커피믹스를 진하게 탄다. 종이컵의 3분의 2 정도까지 물이 올라오도록. 한 모금 하실 때 욕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따뜻하게.


이제 차장님과 나란히 민원인 앞에 앉아서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차장님은 그분의 화가 하소연이 되어 조금 말랑해질 때까지 계속 들어주신다. 나는 차장님 옆에서 그분의 말을 열심히 받아적으면서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병아리 공대여자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법을 익혔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화가 누그러질 수 있는 믹스 커피와 물의 조합을 배웠다. 무엇보다 진심으로 누군가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다. 나에게 월급을 주고 나의 복지를 책임져주는 회사 말고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는 나의 일에 대한 시야가 조금씩 넓혀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르신들과의 대화가 익숙해질 무렵, 혼자 야근 중이던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OO 건설단이죠? 내 돈 왜 안 주는 거에요? 나 진짜 너무 힘들어. 아가씨. 나 집에 불 지르고 나도 죽을 거야." 수화기 건너편에서 민원인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원인에게 따뜻한 차를 드릴 수도 없고 상대방의 표정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선생님. 진정하시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야기를 해주셔야 도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을 이어갔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그는 신용불량자였다. 통장조차 만들 수 없었던 그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식구들을 굶길 수 없던 그는 별수 없이 여동생의 통장을 빌려 우리 현장을 치우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잡부의 일을 했다. 그런데 하도급사에서 그의 임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뤘고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그는 지금 생계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 제 얼굴 아시죠? 현장에 혼자 돌아다니던 여자 감독 보신 적 있으시죠?" 그는 내 얼굴을 안다고 했다. 현장에서 몇 번 봤다고도 했다.


"선생님. 그러면 제 얼굴을 봐서라도 조금 진정하세요. 가족들은 옆에 계세요?" 그는 외국인 여성과 결혼을 해서 슬하에 자녀가 하나 또는 둘이 있다고 했다.


"에고. 선생님. 그럼 가족분들을 봐서라도 나쁜 생각은 안 하셔야죠." 나는 울먹였다. "내가요. 얼마나 답답하고 화나 가면 이러겠어요. 아니 감독님. 나는 그날 일해서 하루씩 살아가는데. 그놈들은 돈도 안 주고. 내가 다리도 불편해서 어디 다른 일도 못 가고 있는데." 나는 집 주소라도 알려주시라고 내가 찾아가겠노라 했다. 그는 한사코 사양했고 겨우 이름 세글자알려주었다. 그는 나를 믿고 며칠 더 기다려보겠노라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음날 정의로운 민원 해결사 주 차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그날그날 먹고 사시는 분들에게 이 무슨 불합리한 일이냐며 분통을 터뜨리셨다. 장비 대금 미지급에 대한 민원도 몇 차례 누적되었던 회사라서 나의 사수님도 함께 나서주셨다. 이미 우리에게 공사 대금의 일부를 받아간 도급사에도 이 내용을 알렸다. 도급사는 하도급사에 배정된 금액을 이미 지급했노라고 해명했다.


며칠 뒤 나는 사수님, 차장님, 부서장의 결재를 득하고 입금 및 장비 대금 미지급에 대한 사실 안내 공문을 발송했다. 발송처는 미지급 사건의 주범인 하도급사가 건설업을 등록한 지역의 구청이었다. 관련법에 따라 발주청은 하도급 대금 미지급 건이 발생하는 해당 지자체에 통보하여야 하고, 지자체는 문제를 일으킨 회사에 시정명령을 내려야 한다. 시정명령 이후 지급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 회사는 과징금을 받게 될 것이었다.


구청 담당자는 공문을 접수하기 전 나에게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공문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잘 상의해서 선생님 선에서 처리하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우선 이 공문은 접수해서 시정 명령 내리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매달 월급을 꼬박꼬박 받는 사람들이 모르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세계에 대해 당신이 아느냐며 따지고 싶었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몇이 번거로워서 알아서 잘 해결되길 바라는 일이 누군가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 후 하도급 관련 법과 대금 지급에 관한 법률이 상당 부분 제정 및 보완되었다. 일정 금액 이상의 공사의 경우 근로자들에게 노무비를 직접 지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선금의 경우 노무비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게 증빙 제출 등에 대한 기준이 정비되었다.


그런데도 일이 많지 않아 하도급사에 아쉬운 소리를 하며 일을 구해야 하는 근로자들과 장비 업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법의 사각지대는 아주 많다.


최근의 일이다. 장비를 소지하고 계시는 분들과 근로자 몇 분이 다짜고짜 사무실에 와서 나를 찾았다. 현장에서 얼굴을 많이 뵌 분들이라 나는 우선 반갑게 인사했다. 이제는 나를 도와 민원을 대신 해결해줄 선배들도 없다. 각자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나는 예전보다 능숙해진 차 타는 솜씨로 재빠르게 몇 잔을 내온다. 차를 가지고 회의실에 간 나는 날씨 이야기로 너스레를 떨며 인사를 건냈다. 잘 지내셨냐며 이 현장 진행하시느라 너무 고생이 많으셨다고 했다.


공사가 잘 마무리되어서 뿌듯하다고 그분들은 대답했다. 감독님에게 하기 미안한 이야기지만, 장비와 임금 체불 건이 있어 해결을 요청하려고 왔다고 말을 꺼냈다. 나는 미지급된 항목과 금액을 상세하게 적어주시고, 지급처의 계좌번호, 성함, 연락처도 모두 적어주고 가시라고 했다. 현장 소장과 협의 후 결과를 일일이 안내해드리겠노라고 했다. 그분들은 다시 한번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이야기하시고 내용이 상세하게 적힌 미지급 내역을 두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현장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지급 건을 파악하고 있는지 묻는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까지 오게 하는지에 관해 묻는다. 현장에서 알아서 처리하시면 될 일 아니냐고 소장을 원망한다. 소장은 자기선에서 파악된 부분에 대한 내역을 나에게 보내오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리스트와 비교해서 상이한 부분에 대해 소장에게 알려준다. 해결 기한을 정하고 해당 내용에 대한 처리 없이는 준공금 지급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한다. 며칠 뒤 소장은 금액을 모두 지급했다고 유선상으로 통보한다. 나는 못 믿겠으니 민원인들의 합의서와 공증을 받아오라고 한다.


나는 이제 울먹이지 않는다. 상대방의 입장에 나를 놓지 않는다. 다만 이 문제가 터지기 전에 나에게 피해가 올 만한 일을 미리 대처하지 못한 데에 대한 후회를 한다. 민원이 발생하고 나서는 나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면피를 위한 서류나 증빙을 준비한다. 거의 모든 일에 향후 안전사고, 하도급 관련 민원 등이 발생했을 때 내가 나를 보호할 방안들을 모색해놓는다.


9년 전, 나를 원망했던 구청 직원이 생각난다. "알아서 처리하시지 그랬냐"는 그 무기력하고 귀찮은 듯한 목소리. 네가 쓸데없이 일을 키웠다는 그 말투.


9년 전, 첫 현장에서 민원인들과 자주 함께 울고 자주 함께 화를 냈던 내가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법령과 문서의 새로운 서식에 대한 모법까지 하나하나 검토하고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면피가 아닌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나의 최선이었던 것 같다.


사회생활 10년 차, 지금의 나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다시 궁금해졌다. 면피를 위한 또 다른 면피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민원인에게 따뜻한 차를 내어주며 업무 노트에 그들의 말들을 정성스럽게 적고 간직했던 그때의 내 마음을 잊어버린 게 아니었는지 말이다.


9년 전 그분은 아내분과 자녀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계실지.


나는 이제 다시 누군가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정성을 다해 그분의 이야기에 공감하기로 다짐한다. 면피의 면피를 위한 일이 아닌 누군가의 행복과 정당한 권리를 위해 일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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