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게 하는 말, 살리는 말

[숨그네] 헤르타 뮐러, 숨그네

by mamang



•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 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헤르타 뮐러, 숨그네(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의 인용문 중)




오늘의 이야기


아마도 9년 전이었을 거다. 내가 첫 직장에서 아직 신입이었을 때였고, 나의 첫 상사인 주차장님과 사수님이신 변대리님과 함께 상갓집에 간 날이었으니까.


나는 그곳에서 나의 상사들과 함께 육개장을 먹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좋은 일은 못 가도 어려운 일은 꼭 가야지"하는 다짐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성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에 잘 모르는 사람의 잘 모르는 슬픈 일을 위로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이지 그곳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든든하게 자리 잡고 흔들리지 않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가 있는 이곳이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직을 준비하는 동기들에게 "난 여기 말고 받아줄 곳이 없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내 인생의 최선으로 보이는 그곳에 시간과 체력을 마구 낭비하듯 뿌리고 다닐 때였다.


상갓집에 막 도착한 우리는 인사를 마치고 식사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에는 이미 상사들과 잘 아는 듯한 몇몇 어른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만 아는 업무 이야기, 사적인 근황에 대한 이야기, 상주와 돌아가신 분의 지병에 대한 추측 등 내가 알 것 같기도 하고 도무지 못 알아듣겠는 말을 했다.


나는 허공에 대고 끄덕이며 밥을 씹고 국물을 마셨다. 고사리를 좋아하는 나는 육개장을 맛있게 먹었고 그 위에 풀어진 계란을 건져먹었다. 절편과 꿀떡도 먹고 안주로 나온 진미채도 열심히 뜯었다.


한참 혼자 그렇게 열심히 먹고 있는데, 차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낯선 분이 나에 대해 물었다.


"우리 부서 신입이야. 내 밑에 있어." 차장님은 이렇게 답했고 나는 "안녕하십니까." 하며 자기소개를 덧붙였다.


낯선분은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하며 나를 자세히 봤고 몇 박자 쉬었다가는 "크게 되겠어." 했다. 나는 진미채와 함께 먹을 땅콩의 껍질을 까고 있다가 '이게 머선일인고'하는 생각을 하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네?"


옆에서 듣고 있던 차장님은 즉각 "뭔 말이야. 얘가 여기에서 커봤자 얼마나 크게 될라고."


나는 까던 땅콩을 마저 까서 진미채를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안주를 꼭꼭 씹으며 허공에 대고 끄덕였다.


9년 전의 나는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게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관상이나 사주에 별 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퇴사를 하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또 다른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마른안주를 먹다가 들었던 "크게 되겠어"라는 말을 매번 떠올렸다.


그때마다 나도 모르는 대단한 무엇이 내 안에 있는 것 같았고, 왠지 범상치 않은 가능성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고는 했다. 토익 시험을 다시 볼 때, 자격증 시험을 볼 때, 입사 서류 전형부터 떨어졌을 때, 필기에서 떨어졌을 때,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현장이 잘 돌아가지 않아 내가 독박을 쓰게 생겼을 때에도.


나는 그 말을 떠올렸다. "크게 되겠어."


"말 아픈지 알아야 된다." 어릴 때 내가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말은 아프고 힘이 세다. 말은 기억력이 좋다. 말은 유효기간이 길다. 말은 멀리 간다.


지금은 다른 직장 사람이 된,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누군가가 나에게 했던 말 한마디가 9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고향을 떠나 멀리 거처를 옮겼는데도 나에게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말을 아껴보기로 한다. 나의 힘센 말이 누군가에게도 오래 멀리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입속에서 내뱉지 않은 말들을 고르고 골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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