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봄날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김보통

by mamang


어른이 되면, 달콤한 스카치 캔디보다 쌉싸름한 계피 사탕을 좋아하게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른이 되는 것은 가여운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이 부드러운 달콤함을 즐기며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김보통,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오늘의 이야기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너무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나는 바람에 과하게 들뜬 아침을 보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기까지 한 나는 오랜만에 느끼는 이 개운함은 대체 어디에서 날아온 걸까 잠시 고민할 정도였다.


출근 준비도 나름 수월했다. 화장도 잘 되었고 오랜만에 입어본 바지가 무척 여유롭게 느껴져서 진짜 살이 빠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사실 그 바지는 원래 조금 컸다)


옷차림이 가벼워진 요즘이라 그런지 출근하는 내내 몸도 가벼운 것 같았다.


그렇게 회사에 와서는 기분이 더 좋아졌다. 오늘은 한의원에 가기 위해 2시간 일찍 회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이었기에 업무 강도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오늘은 정말 무리하지 않고 찬찬히 하다가 퇴근해야지 생각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나는 이런 기분 좋은 날에는 있는 에너지 없는 에너지 끌어와서 무리하고서는 소진된 상태로 집에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여유 있는 오전을 보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선배가 말했다. "그 결재 건 있잖아. 좀 어떻게 마무리는 되고 있어? 나는 오늘 보고 드리려고 하는데." 선배가 말하는 그 업무는 워낙 오랫동안 검토했던 내용이라 자신이 있었던 나머지 기분 좋은 점심의 내가 이렇게 말해버렸다. "아. 그거요! 오늘 다 될 것 같아요!"


대답할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며 무리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아. 오늘 4시에 나가야 하니까 지금 미리 해놔야겠다.' 점심의 나는 결국 쉬면서 읽으려던 책을 가방에 넣고 업무를 시작했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타닥타닥 현란하게 키보드를 내리쳤다. 신기하게도 엔도르핀이 솟아오르며 그 순간 일이 재미있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선배와 나의 자료를 통합한 내용을 하나의 표로 직접 만들어 선배에게 미리 보여드리니 선배도 나의 박자에 맞춰 팀장님께 보고를 마쳤다.


선배와 나는 그렇게 정리된 예산 절감과 공사의 고품질 확보를 위한 든든한 대안을 들고 부서장님을 찾아갔다.


찬찬히 오랫동안 서류를 보더 부서장은 "어. 이거 뭐야. 숫자가 이상하네?" 하며 말을 시작했다. 평소 숫자들을 여러 번 재확인하는 나는 오늘따라 그 과정을 건너뛰었고 하필 부서장이 그 부분을 집어낸 것이었다.


그는 점점 더 집요하게 질문하기 시작했고, 결국 내용을 수정해서 팀장님의 재결재를 받은 다음 다시 가져오라고 했다. 문서를 결재한 팀장님에게도 너무 민망한 상황이 되어 나는 왜 월급을 받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조퇴를 해야 하는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다른 부서 선배도 한의원에 가신다고 해서 그 차를 얻어 타고 갈 예정이었는데. 지금 뛰어가도 조금은 늦겠다는 생각에 나는 더욱 초조해졌다.


나는 지적받은 문서 수정을 미루고 급하게 사무실을 나서야 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한의원 동지 선배님은 나를 반겨주셨다. 본인도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난 줄을 모르고 있었다고 하셨다. 우리는 선배님이 간식으로 싸오신 오이를 맛있게 나눠먹으며 한의원으로 향했다.


함께 결재에 들어갔던 선배에게 인사를 제대로 못 드리고 온 찝찝함과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 그리고 오늘 오후 내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는 아득함을 곱씹어보았다.


하이패스가 있던 선배님의 차는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중 하이패스 단말기가 무효한 유료도로를 만났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나의 소액 결제로나마 보답을 하고 싶었다. 아무리 코트 주머니를 뒤져도 카드가 잡히지 않던 그 순간, 사무실에 벗어놓고 온 재킷을 떠올렸다. 점심시간에 넣어뒀던 나의 카드.


나는 선배님께 "아. 카드가 없네요." 그러고선 "괜찮아 하이패스 있어." 하는 선배님에게 "저 도로는 하이패스가 안되거든요. 그래서 제 카드로 결제하려고 했는데... 선배님 그런데 저 병원비도 차비도 없어요."


은행에 있는 나의 용돈이 철저히 사이버 머니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딸의 병원비를 내주는 엄마처럼 선배님은 병원비를 내주시고 차비하라며 만원을 주셨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찬 바람이 휙 불어왔다. 혼자 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온몸이 추워서 양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걸음을 재촉했다. 역에 들어가서 우리 집에 가는 지하철 표를 하나 샀다. 백 원짜리 오십 원짜리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를 거슬러 받아 들고 플랫폼으로 가는 길에 따뜻한 어묵이 보였다. 천 원으로 어묵 한 개와 국물 한 컵을 마셨다. 손에 잡히는 지폐를 오랜만에 사용하지 현실감각이 조금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배속의 따뜻함이 몸에 찬찬히 도는 것을 느끼며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방금 그 어묵집에서 핫바 하나를 사 갔던 남자분이 큰 소리로 통화를 시작했다. "엄마. 나 인천이라니까. 엄마 뭐해? 나 어묵 샀어 어묵. 삼진어묵! 엄마 그런데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나는 그가 사 온 어묵을 맛있게 먹을 그의 엄마와 엄마가 만들어준 따뜻한 밥을 맛있게 먹을 그를 상상한다.


"아 쫌!"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모녀로 보이는 두 분이 플랫폼 벤치에 앉아있었다. 딸이 엄마에게 내는듯한 아주 익숙한 분위기의 짜증이었다. 특이했던 건 따님이 40대 중반, 어머닌 70대로 보였다는 거였다. 대부분 저 정도 나이의 딸이라면 엄마의 행동에 크게 일희일비하지 않고 무감해질 듯한데 짜증 내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오히려 정감이 갔다. 마치 어린 시절의 딸과 젊은 엄마처럼 허물없어 보이는 중년의 딸과 노년의 엄마는 내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지하철이 도착했고 나와 그분들은 지하철에 올라탔다. 나는 운 좋게 자리에 앉았고 그 어머니는 내 맞은편에 앉으셨다. 다시 한번 짜증을 내며 저기만치 가서 따로 앉아버린 딸에게 어머니는 딸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 내어 말했다. "이리 와. 여기 앉아." 하며 본인의 오른편 자리를 두툼한 손바닥으로 툭툭 쓰다듬었다.


어머님은 따님에게 거절을 당했는지 에헴 기침을 한 번 하셨다. 그러고는 지하철에 올라탄 중년 여성분이 그 자리에 앉으려고 다가오니 손을 치워주셨다. 어머니는 조용히 "우리 애 앉히려다가." 하시며 머쓱하게 웃으셨다.


몇 정거장을 더 가다가 이번에는 어머니의 왼편 자리가 비었다. 어머니는 다시 한번 왼편에 손을 올려놓고 툭툭 쓰다듬었다. 시선을 딸이 있는 방향에 고정한 채 이번에는 눈빛으로 딸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리 와서 엄마 옆에 앉아."


나는 눈이 뜨거워져서 책을 펼쳐 들었다. 어르신의 왼편도 결국 다른 승객의 차지가 되었다.


기분이 좋고 이상하게 에너지가 넘치던 오늘 아침을 다시 기억해본다. 그리고 유년기의 우리 집을 떠올려본다. 안전하고 따뜻한 집에서 내가 보호받았던 안정감을 돌이켜본다. 네가 뭘 해도 괜찮아하는 듯 건강하기만 하라는 나를 둘러싼 성실한 바람들. 존재 자체로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일 뿐이었던 시절. 마음껏 잘못을 저지르고 옷을 수없이 더럽혀도 괜찮다는 자유로움.


아주 높은 행복과 아주 깊은 슬픔이 함께했던 오늘. 어떻게 보면 오늘이 진짜 운이 좋았던 봄날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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