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를 먹고 세상인심 따라 영악하게 살다 보니 이런 소박한 인간성은 말짱하게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문득 생각하니 잃어버린 청춘보다 더 아깝고 서글프다. 자신이 무참하게 헐벗은 것처럼 느껴진다.(박완서 산문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오늘의 이야기
나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정확히 말하면 2번의 지하철 노선과 1번의 셔틀버스를 거쳐 회사에 도착한다. 긴 출근시간을 그나마 버티게 해주는 것은 이런 와중에 책을 읽는 나에 대해 스스로 느끼는 우월감이었다. 한 번은 지인이 "지하철에서 책도 읽고 대단해요!"라고 했다. 내가 자조 섞인 말로 이렇게 답했다. "눈은 분명 책에 가 있는데, 현실은 내 발 밟으려는 옆사람, 자꾸 미는 뒷사람을 속으로 욕하기 바빠요. 허허."
이렇게 한번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책의 페이지만 넘어가게 되는데. 오늘 아침도 그런 날이었다.
내가 타는 지하철은 모든 의자에 사람들이 빠짐없이 촘촘하게 앉아있는 상태로 역에 도착한다. 그나마 그 사람들 바로 앞자리에 든든하게 서있어야 9호선의 아비규환에서 납작해지지 않을 수 있다. 오늘도 냉큼 올라타 다리를 든든하고 넓게 벌려 서서 책을 읽었다. 한 정거장 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내 오른쪽에 틈새를 비집고 여자 한 분이 들어왔다.
좌석 바로 앞자리에 서 있지 않으면 곤욕을 치를 것 같아 무리해서 끼어들어온 듯했다. 오늘은 마침 일주일 중 내가 가장 피로를 느끼는 수요일이었고, 몸이 묵직하고 무거워서 마음속에 짜증이 올라왔다. 왼편으로 내가 몸을 피하니 쏙 사이로 들어온 그분이 얄밉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고 있는데 이제는 나에게 몸을 너무 기대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내가 이렇게 조금씩 양보하다가는 문밖으로 나가겠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분은 계속 몸을 내 쪽으로 기대고 있었고 나는 나의 오른팔을 그녀의 몸에서 떨어뜨렸다. 그러니 그분이 종잇장처럼 좌우 앞뒤로 조금씩 그리고 자유롭게 흔들리는 것이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그분은 졸고 있는 듯했는데 중간중간 잠들지 않으려고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얼마나 피곤하면 일어선 채로 저렇게 잠을 쫓고 있을까. 하는 마음에 너무 미안해졌다. 하도 말라 보여서 내가 업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녀에게 오른팔을 맘껏 빌려줄 걸 하는 후회에 지하철에서 내리고도 한참 마음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