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마음담론

"꼭 일하는 여자가돼라"는엄마의 말

[마음담론] 사랑은 사치일까

by mamang


내가 어릴 때, 아빠는 아주 가끔 요리를 했다. 사냥을, 낚시를 그도 아니면 등산을 다녀와서 꿩이고 물고기고 각종 나물들을 잔뜩 해왔다. 그렇게 가져온 동식물들을 자랑스럽게 펼쳐놓았던 아빠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지금도 기억난다. 평소에는 요리를 전혀 하지 않다가도 본인의 수렵 능력을 과시할 때만 선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는 아빠였다.


나에게 아빠의 요리는 낯설고 그만큼 어쩌다가 한 번씩 맛볼 수 있는 요리였다. 그래서인지 매일 먹는 할머니의 집밥, 엄마의 식당 밥보다 아빠의 요리가 더 인상 깊고 맛있었던걸로 기억한다.


식육식당을 하던 아빠 엄마는 매일같이 고기 비린내 같은 것을 옷에 묻혀왔다. 가족끼리 오손도손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대화를 하다가 잠에 드는 일은 없었고. 할머니와 우리 4남매는 할머니가 한 밥을 먹고 할머니가 보는 일일연속극과 미니시리즈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잠들었다. 할머니와 함께 잠들어 있다 보면 엄마가 집에 왔고 뒤늦게 아빠가 왔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어머니 저 왔어요." 하고 방에 들어갔던 것 같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던 아빠는 빠다 코코넛이고 육각 상자에 들어있는 꼬깔콘이고 한 봉지 더라고 쓰인 종이가 든 치토스를 사 왔다. 그는 검은 비닐봉지를 우리에게 주며 잠을 깨웠다. 잠을 자던 우리를 깨워 일으켜 과자를 먹어보라고 했고 그러다가 할머니한테 혼나 방에 돌아가 잠들었던 아빠였다.


어린 그 시절의 나의 눈에 우리 집의 모든 어른들은 위태로워 보였다.


친구라고는 윗집 앞집 아랫집에 사는 이웃들이 다였던 나의 할머니. 가장 먼 외출자가 동네 재래시장이었던, 교회 말고는 규칙적으로 어딘가에 나가볼 일이 거의 없었던 할머니. "뭘 먹고 싶다"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평생 한 번도 못 봤던 나는 할머니의 '할머니 다운' 모습 말고 다른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건 학원에 다녀오건 언제든지 집을 지키고 간식을 내주고 밥을 해주던 나의 할머니였으니까. 한 번은 할머니가 시골에 있는 오빠의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그때의 나는 할머니가 우리를 벗어나 그곳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너무 무서웠다. 밤늦게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던 어느 저녁, 등을 돌려 울고 있던 할머니를 보았기 때문이다.


친구라고는 식당 주변 단골집 인쇄소 아줌마들이 다였던 것 같은 나의 엄마. 인쇄소 아줌마들은 자기들끼리 인쇄소 번영회인가 하는 모임을 만들어 산이고 바다고 놀러 다녔는데. 인쇄소들에 둘러싸인 우리 엄마의 식당은 항상 북적거렸지만 내 눈에는 항상 외로워 보였다. 그래도 식당이 그 자리에 항상 지키고 있으니 왔다 갔다 엄마의 고향 친구들이 아주 가끔 들렸는데. 우리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항상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우리 할머니가 있는 집에 엄마 친구들이 마음껏 놀러 오지 못할 테니 엄마에게는 지금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내가 아는 범위, 그러니까 딱 그 식당만큼의 넓이에서 살아가는 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만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만큼만 걸음 할 수 있던 엄마가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가끔 더운 여름에 엄마와 함께 거실에서 잘 때면. 숨 막힐 정도로 나를 꼭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던 엄마의 로션 냄새가 기억난다. 팔을 뻗어 엄마를 꼭 끌어안아주는 대신 "엄마 답답해." 하고 내가 말하면 그제야 스르륵 나를 놓아주던 엄마.


친구가 다방에도, 인쇄소에도, 이곳저곳 어디에도 많았던 나의 아빠. 그의 발걸음은 할머니와 엄마보다 항상 가벼웠다. 점심 장사를 마치면 가게를 엄마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나갔다. 운전을 할 수 있으니 가뿐히 이곳저곳으로 다녔고 친구들도 사귀고 듣는 소식도 다양했다. 장사를 시작한 지 30년이 다 돼서야 겨우 에어로빅이라는 걸 시작해본 엄마와 달리 아빠는 다양한 취미를 계절마다 바꿔가며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당시 식당은 연중무휴였는데. 그렇게 고단한 취미 생활을 하고도 식당에 복귀하면 늦게까지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고기를 구웠고 술잔을 부딪혀 단골을 만들었던 나의 아빠. 그때의 나는 내가 모르는 아빠의 넓은 활동 범위와 젊음이 매일같이 겁났다.


엄마는 한 말을 또 하고서도 불안해져 다시 한 번 더 하는 사람이었다. "가족끼리도 보증 서는 거 아니다"라는 말을 보증이 뭔지도 모르던 초등학생인 나에게 했고. "가스 안전밸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잠가야 한다."는 말을 가스불 켜는 법도 몰랐던 때부터 들어야 했다. 그리고 고등학생 무렵부터는 "여자도 꼭 일을 해야 한다" "직업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매일같이 했다.


엄마의 말에 동의하는 척했지만, 나는 사실 엄마를 비웃고 있었다. 식당에만 신경 쓰느라고 제대로 된 외식 한 번 못했는데. 아빠랑 항상 싸우느라 우리를 두려움에 노출시켰는데. 엄마에게는 그런 조언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아빠의 넓은 행동반경은 이미 따라잡기 글렀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엄마를 원망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 후 커오면서 받았던 많은 상처들을 나의 유년기를 안정적으로 지켜주지 못했던 엄마의 탓으로 돌렸다. 나를 힘껏 껴안았던 엄마의 부채감과 외로움은 나중에서야 겨우 짐작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꽤나 긴 시간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살았다.


이런 나의 마음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엄마가 사회생활을 그만두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도대체 매일 같이 돌아다니는 아빠를 대신해 어떻게 연중무휴의 식당을 34년 동안 할 수 있었는지. 40년 가까이 어떻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었는지. 부인과 시어머니 사이에 전혀 중재나 개입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밥이 차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아직도 물을 떠 오라고 시키는 남편과 어떻게 지금까지 살 수 있는지. 알고 보니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가 아니라 나는 애초에 '엄마처럼 사는 일이 엄두조차 안나는'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여자에게 중년의 삶이 마법이라는 것은 이제 우리가 여러 가지 일을 자신이 통제하며 스스로 시간과 방식을 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사랑은 사치일까, 28쪽)


엄마는 34년 된 식당을 정리한 후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후 중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했고,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코로나 시대의 여고생으로 당당히 등교를 해내고 있다.


페미니즘이 주장했듯 진정한 사랑이 오직 동등한 둘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면,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남성이 그들의 가부장적 사고와 행동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다.(사랑은 사치일까, 73쪽)


본인은 남편의 물을 떠다 바치되 남동생에게는 '나중에 결혼하면 이런 거 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엄마. 본인은 우리의 부탁을 다 들어주면서 서울 병원에 갈 일이 있어 올라와도 '신경 쓰지 마라. 나 버스도 타고 알아서 다녀갈 수 있다.'라고 하며 전남에서 분당까지 먼길을 알아서 다니는 엄마. '우리 세 딸들 집 하나씩 다 사주려고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어. 근데 집이 이렇게 비싸질 줄 몰랐다.' 하며 웃는 엄마의 얼굴.


어떻게 보면 그 시절 엄마의 불안, 할머니의 불안, 아빠의 불안이 조금씩 섞여 나로 반죽되어 온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미워할 수 없는, 나에게 불안을 줬던 사람들은 그 시절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고 억울했을까.


그들은 서로의 불안을 어떻게 느끼고 있었을까. 자신의 불안만으로도 버거웠을까. 생생한 그 시절 젊었던 그들의 불안이 예민했던 나의 마음에 남아있다. 불안을 물려주지 않으려 나름의 방법으로 고군분투했을 나의 어른들. 불안하지만 예쁘고 잘생긴 마음들. 다시 그때의 여름으로 돌아간다면 나를 숨 막히게 꼭 안던 엄마를 나도 함께 꼭 안아주고 싶다. 불안해하지 말라고. 다 잘 될 거라고. 모두 다 잘 클 거고 언젠가 그들에게 이해받을 거라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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