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링굿] 슬픔은 우울증이 아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 이유
필링굿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 마음의 죄의식과 우울감, 그리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나의 상황들을 비틀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직은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다.
죄의식과 슬픔, 그리고 우울증에 대한 부분을 만나고, 지난 20년 넘는 시간 동안, 그리고 최근 이 책을 읽는 여정을 시작하면서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일이 있다. 이제 지난 시간 동안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일요일 저녁 우리 집으로 인터폰이 걸려왔다.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던 친한 동생 Y가 나에게 집에 놀러 올 수 있냐고 물었다. 그때는 가정 시간의 실습 과제(집에서 타래 과자 만들어보기)를 하느라고 친구 집에 다녀온 뒤였다. 사실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귀찮아서 "나 숙제해야 돼. 다음에 놀자." 했다. 동생은 일찍 단념한 듯했다. 나는 전화를 끊고 텔레비전도 보고 별 일없이 놀았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날인가 그다음 날엔가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집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고 학원 선생님이 급하게 나를 찾았다. 당시 핸드폰이 없었던 나는 선생님 방에 가서 전화를 받았는데, 할머니가 Y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있다고 집으로 우선 와보라고 하셨다.
내가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 아빠, 엄마까지 우리 집 거실에 앉아계셨다. Y가 교통사고에 당했는데 엄마, 아빠까지 왜 집에 와있는 거지? 하며 멍하니 있었는데, 아빠가 대표로 말을 꺼냈다. Y가 하늘나라로 갔는데,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는지 스스로 하늘나라에 가는 걸 선택했다고 했다.(아빠의 말은 조금 직접적이었으나,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대로 적어보겠다.) 아닌데? 분명 나랑 이번 주말에 놀기로 했는데?
나는 Y의 엄마 아빠가 힘들어하실까 봐 꽃도 직접 전해주지 못했다. 분명 꽃은 아빠랑 같이 샀던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두고 왔더라? 예쁜 하얀 국화꽃을 예쁜 Y의 사진 옆에 두고 인사도 나누고 싶었는데. 평소 우리 동네에서 소문난 단짝이었고 서로의 집에 가서 자고 오는 유일한 친구였던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때 Y의 사진이라도 보고 왔으면 활짝 웃는 예쁜 얼굴로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
Y는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똑똑했다. Y는 3살 언니인 나보다 아는 것도 정말 많았고 영어도 잘해서 영어 단축어를 통해 외국 친구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려준 사람이다. 얼굴도 하얗고 말도 참 잘해서 나는 Y가 말하는 걸 보고 있으면 어른이 된 우리는 뭘 하고 있을까 상상을 하기도 했다.
Y는 나의 자랑이자 친절한 안내자였다. 언니인 내가 뭐든지 가장 늦었지만 나를 비난하거나 나쁜 말을 써서 속상하게 만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구운 마시멜로우도, 접이식 침대도, 집에서 할 수 있는 펌프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배울 수 있게 도와줬다. 항상 빠르게 배우지 못하는 나는 Y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Y와 나는 1~2년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때 Y는 교환교수님으로 외국에 가신 엄마를 따라 미국에 다녀왔다. Y가 마음이 아팠던 이유를 궁금해하던 어른들은 Y가 다시 돌아온 한국의 학교에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물론 내 앞에서 어른들은 본인들에게만 들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Y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항상 재미있게 웃고 떠들면서 공룡이 풍선을 터뜨리는 게임을 하고 외국에서만 살 수 있는 신기한 과자들을 먹으면서 놀이터 같은 Y의 집에서 행복한 이야기만 했던 기억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왜 Y가 힘든 시간을 혼자 견디고 있다는 걸 몰랐을까. 나는 왜 웃고 떠들고 먹을 줄만 알았을까. 나는 왜 Y의 전화를 받고도 핑계를 대면서 나중에 놀자고 미뤘을까. 나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내가 Y와 주말을 같이 보냈다면 Y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건전한 슬픔과 우울증의 차이
필링굿의 9부 '슬픔은 우울증이 아니다'에서 저자는 '건전한 슬픔'과 '우울증'의 차이를 말한다. 처음엔 '개소리'라고 생각했다.(솔직한 감정은 정말 그랬다.) '건전한'과 '슬픔'을 함께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낯설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슬픔은 건전한 것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굴곡이 많은 삶은 어느 정도의 굴곡이 있어야 그런 삶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적어도 슬픔은 우울 그 자체였다.
슬픔이란 상실이나 실망 등 부정적 사건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인식한 결과 생겨나는 정상적인 정서다.
우선, 나에게 있어 슬픔은 '정상적인 정서'의 범주에 넣기에는 너무 아픈 감정이었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이제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나는 이 사람을 잃었어. 우리가 나눈 우정과 사랑을 그리워할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반면에 "이 사람이 죽었으니 나는 다시는 행복하지 못할 거야. 불공평해!" 또는 "나 때문이야!"라고 생각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우울증과 슬픔 모두 자기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이 무산되거나 실패했을 때 생겨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슬픔은 왜곡 없이 온다. 슬픔이란 감정의 흐름이므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사라진다. 또한 슬픔 때문에 자존감이 다치는 일도 없다.
하지만 우울증은 꽁꽁 얼어붙어 있다. 그래서 끝없이 지속되거나 반복될 뿐 아니라, 자존감 상실도 동반한다.
이 부분에서도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슬픔이라니. 시간이 흘러 사라질 수 있을 정도의 슬픔이라면, 상대방을 정말 아꼈던 게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저자는 뚜렷한 원인이 있는 우울증을 '반응성 우울증', 원인을 분명히 밝혀내기 어려운 경우를 '내인성 우울증'으로 나눌 수 있다고 전한다. 우울증의 원인을 통해 둘로 나눌 수 있지만, 원인은 '왜곡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동일하고 우울증은 최악의 고통만 안겨줄 뿐이며, 그나마 가치가 있다면 우울증에서 회복될 때 그만큼 성장을 경험한다는 것뿐이라고 덧붙인다.(성장하고 싶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의 고통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나의 생각이다.)
이어서 병과 경제적인 무능함 때문에 우울증을 호소하는 나오미와 할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병에 걸려도, 경제적으로 가정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해도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안내해준다. 이 중에서 할이라는 사람이 매일 아침 큰 소리로 읽겠다고 결심한 글이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 이유
1. 나와 다른 사람에게 기여할 게 있는 한,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3.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소중하다면,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이 단 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해도 그렇다).
대학시절, 친한 고등학교 친구가 갑자기 자기를 찾지 말라며 핸드폰을 끄고 잠수한 후 해맑게 다시 나타났을 때 나는 그 친구에게 울면서 제발 이런 짓을 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말라고 애원한 적도 있었다. 10년이 지난 후, 그때 처음 내 마음속의 깊은 불안과 우울을 다시 마주한 경험이었다. 그때가 누군가에게 Y의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큰 잘못이 있다는 생각 속에 나를 고립시켰다. 그리고, 주변의 친구와 가까운 사람들이 고통을 겪거나 힘들어하는 것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식의 왜곡된 사고로 나를 소진해왔다. 내가 그들에게 미치고 있을 긍정적인 영향에 집중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일어나는 많은 사건사고, 그리고 슬픔들의 화살표를 나에게 던져왔던 것 같다.
고질적인 압박을 스스로에게 오랜 시간 선물했으니 나에게 죄의식과 왜곡된 슬픔은 항상 옆에 있는 오랜 정든 친구였던 것 같다. 익숙한 감정에서 벗어나기보다 결국 그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해왔기에, 조금 늦었지만 이제야 내 감정의 진짜 모습을 용기 내서 마주하는 중이다.
나에게 여전히 꽃 같고 예쁜 그 아이를 정말 떠나보낼 수 있을 때가 오면, 두 손 모아 그 아이의 남은 가족의 평안과 사랑이 가득하길 기도해줄 것이다. 지금도 너의 미소를 또렷이 기억할 수 있음에 감사와 축복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