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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Sep 09. 202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넌 뭘 하고 싶니 (공대여자 말고 그냥 나)


29살의 진로 고민


세상에나. 나는 29살이 되어서야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이게 맞을까?” 하고 내가 가던 길을 나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나도 몰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해의 나는 놀랍게도 29살이었다. 더 놀랍게도 내가 어디쯤 있는지 생각해보았던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친구들이 시집가고 의지할 남편이 있는 걸 부러워했던 내가 말이다. 남들 일에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내가 지금 어디쯤인지를 몰랐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나는 뭘 하면서 살아온 거라니? 궁금했는데 나도 모르는 걸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선배들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회사에서 탈출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뛰쳐나오려고 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맞이했다.




내 인생 첫 후임


회사에 퇴사하겠다고 통보하기 전 후임에게 가장 먼저 말했다. 그 누구보다 당황했을 후배가 나를 먼저 걱정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후임 : 대리님 실례지만 퇴사하시면 뭐 하실 계획이세요?
공대여자 : 예전에 가정통신문에 부모님이 원하는 장래 희망이 항상 선생님이었거든요.
후임 : 선생님 하시게요??
공대여자 : 아니요. 허허. 제가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 있어요. 선생님들처럼 같은 실내화를 신고 30년 이상 똑같은 복도를 걸어 다닐 자신이 없다고요. 사실 성적도 안 됐지만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어요.
후임 : 순환 근무 없는 직장이요?
공대여자 : 네. 그리고 예측 가능한 일을 하는 곳으로요.

 

진로에 대해 아직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신기하게도 후임의 물음에 뭔가 정해진 게 있는 척 답을 하다 보니 뭔가 딱 걸리는 게 하나 생겼다. 근무지가 일정하고 예측 가능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


후임과 나는 같은 대학교의 같은 학번으로 졸업했다. 대학 내내 크게 마주칠 일은 없었다. 나와 후임은 회사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나보다 1년 늦게 입사한 후임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도 항상 존대했다. 물론 나도 선을 긋고 싶어 말 편하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후임은 참 착했다. 그런 그는 내가 퇴사를 하면 독박을 쓰게 생겼다. 코딱지만 한 인력으로 일을 꾸려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월급은 1인분일 예정이다.


후임은 노력형 눈치를 가졌다. 텃밭의 잡초를 뽑으러 갈 때 머뭇거리다가 눈치를 보며 따라나섰다. 내가 차장과 부서장에게 욕을 먹어야 할 때는 함께 욕받이가 되어주었다. 내가 고라니를 다치게 했을 때 찬찬히 내차 뒤에 따라오면서 고라니의 상태를 확인해줬다.


"이제 퇴사하니까 밖에서 만나면 말 편하게 해요." 내가 쿨한 척 말했다. "네 대리님. 대리님 용기 정말 멋져요. 건강하시고요." 하며 나를 응원했다. 동갑인데도 꾸벅 인사를 한다.


내가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아준 것 같았다. "대리님 가시면 저 혼자 죽어나겠어요." 하는 부담의 말은 보태지 않았다.


"남아있는 사람,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래요. 저는 애석하게도 못 버틴 거고요. 취업하고 소고기 사주러 올게요!" 하고 남은 짐을 싸서 떠났다.



평범하게 사는 것

예상 가능한 일을 하며 주거지역의 안전성을 갖는 것. 내가 이런 평범한 삶을 꿈꾸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부모님은 30년 넘게 한 자리에서 고깃집을 했다. 나는 7살 때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 온 것 말고는 29살까지 한집에서 살았다. 아주 잘 살지도 몹시 어렵지도 않았다.


나는 평범한 부모님처럼 안 사는 것. 그게 꿈이었다. 평범하지 않고 멋지게 살고 싶었다.


막상 사회생활을 해보니 알게 되었다. 엄마 아빠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평범한 게 가장 멋진 일인 건 확실했다.



퇴사하고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뭐였을까.


나는 딱 1달의 시간만 천천히 보내보기로 했다. 가족들은 재촉하지 않았고 나도 마음이 급하지 않았다. 29이든 30이든 이미 남들보다 천천히 가기로 한 이상 바쁠 건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본가에서 도보로 10분이 안 되는 거리에 시립 도서관이 있었다. 시험 기간이 아니면 절대 가지 않던 곳이었다. 서점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이라는 책을 샀다. (왜 이 책이어야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독서대와 그 책만 달랑 들고 칸막이 없는 열람실에 가서 온종일 읽기만 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느리게 읽었다. 독서대에 책을 올려놓고 손으로 한 줄 한 줄 집어가며 읽었다. 멋지다고 생각하는 문장에는 밑줄을 그었다.


한 달 동안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시간에 도서관으로 갔다. 아침을 먹고 책을 읽다가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돌아와서는 다시 또 읽다가 저녁이 되면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다.


겨우 다 읽어 내려간 후에는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책을 읽다가 졸리면 엎드려 잤다. 그냥 그대로 타이머 알람 없이 내리 엎드려 잤다. 졸리면 이마를 그냥 바로 팔뚝에 얹혀놓으면 된다는 자유스러움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자다 보면 팔이 저리거나 이마가 저린다. 얼굴을 좌나 우로 돌려서 자면 목이 아파서 깨곤 한다.


자다가 일어나서 자판기 커피에서 달곰한 커피를 뽑아 먹는다. 그러다가는 다시 들어가서 한 줄씩 짚어가며 읽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이 책을 펼쳐보니 대략 이런 곳에 줄을 쳐놓았다. 그 당시 나의 고민이 다시 떠오른다.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p.13)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p.357)


(인생이 리셋될 수 있다면 어떨까. 퇴사 직후 참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의 선택에 대해서 누군가가 이 길이 맞다, 아니다 저길 이다. 하고 일러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들 각자에겐 과거에 한 몸을 이루었던 반려자가 이 세상 어디엔가 있다고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p.384)


(29이든 30이든 급하지 않다고 해놓고 결혼은 무척 하고 싶었던 이중적인 공대 여자. 그때 즈음에는 나를 뺀 모두가 행복한 줄 알았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잘 크고 있나? 하는 텔레파시를 신원미상의 미래의 반려자에게 보내곤 했다.)



말하지 않을 권리


도서관에 다니면서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 하나가 있다. 온종일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회사에 있을 때는 사무실 전화와 개인 핸드폰으로 수십 통의 전화를 걸고 받아야 했다. 주로 세게 보여야 하고 얕잡아보지 못하게 힘을 주어야 했다. 때로는 화를 내고 윽박지르고 전화를 끊는다. 내가 업무를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위한 방식이었다.


고로 나의 일상은 사무실의 생활 소음과 내가 싸우는 소리, 동료들이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높이는 언성이었다.


나는 내가 말하는 걸 좋아하고 말 듣는 것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퇴사하고는 가장 먼저 침묵을 찾았다. 말하지 않아도 될 권리를 되찾은 것 같아 행복했다. 아무래도 나는 과묵한 사람인 것 같다. 확실하진 않다. 사람은 변하니까.


회사를 그만두고 좋았던 게 또 하나 있다. 이제 나의 교감신경이 날뛰지 않아서도 좋았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태에서 떨어질 줄 몰랐던 교감신경이 마음 놓고 푹 내려앉아도 괜찮았다. 예기치 못했던 사고들이 마구잡이로 발생했던 그 시절 이후 나는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 또한 확실하진 않다. 사람은 변하니까.


그렇게 나쁜 말들을 정화하며 한 달을 보냈다. 그 후에는 퇴사 전에 내가 준비했던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3가지의 주요 질문을 놓고 주로 고민했으며, 그 결과 몇몇 목표 회사를 축소할 수 있었다. 그렇게 29살의 늦은 취업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 후

나는 예상 가능한 일을 하고 거주지가 일정한 회사에 취업했다. 나의 후임이었던 W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말을 놓기로 했다.

공대여자 : W야! 나 취업했다야!!!
후임(W 군) : 공대여자야 진짜 대단하다! 너무너무 축하해!
공대여자 : 내가 소고기 사러 내려갈게!!
후임(W 군) : 오예! 그럼 우리 부서 YB들에 연락 돌릴게! 조만간 보자!




[참고 : 진로를 선택할 때 내가 했던 3가지 주요 질문]


01) Q. 월급을 적게 줘도 괜찮은가?

 A. 지갑이 얇아도 수명이 긴 직장이 좋다.

반평생 식당을 운영하신 부모님은 수입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다만 부모님은 연중무휴로 일하는 탓에 아침에 나가서 10시 넘게 들어오셨다. 가족끼리 나가서 외식을 해본 적도 없었다. 돈은 적게 받아도 남들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는 일을 하고 싶었다.


02) Q. 내 전공이 좋은가?

 A. 아니다. 탈 토목이 답이다.

토목을 전공해서 업으로 삼고 있는 친구들과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탈 토목을 했어야 이 꼴 저 꼴 안 보는데" 토목이 아닌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것을 탈 토목이라고 부른다. 물론 경력을 이용하려면 토목직이 유리하겠지만, 대부분의 업무환경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행정직을 목표로 했다.


03) Q. 최대 구직 기간은?

 A. 1년 이내에 취업에 성공하겠다.

1년이 지나면 토목직 공무원에 응시할 예정이었다. 물론 토목직 공무원도 1년 이상을 준비해야 하고 당락도 정확하지 않지만. 목표로 하는 공공기관, 연구원, 연구소 등의 행정직은 워낙 소수이기 때문에 1년 안에 되지 않을 수 있다. 그 후에 남은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공정한 시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3가지의 주요 질문으로 대략적인 방향 선정과 지원 예정인 회사 목록을 정리했다. 사람인, 공준모 등의 사이트를 통해서 지난 공채 전형의 공통적인 스펙을 조사했다. 6개월 이내에 기본 스펙(토익, 컴퓨터 자격증)을 만들고 그 후부터 공격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최대 5살 어린 후배들과 경쟁을 해야 하니 체력 관리를 위해 꾸준히 운동하기, 살찌지 않기, 친목 모임 나가지 않기 등 세부 실천 계획을 수립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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