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마음담론

[사랑의 기술 2] 사랑의 이론

에리히 프롬과 함께 보는 영화 페인티드 베일

by mamang
영화 포스터(출처 : 네이버 영화)


남사친들과 주로 뭉쳐 다니던 대학교 1학년 시절, 남자 선배 한분이 남사친들에게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는 방법에 대해 꿀팁을 전수해준 적이 있었다.


선배 :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식당에 가서 여자의 시선이 벽을 향하도록 구석에 앉아. 여기에서 중요한 건 너희는 벽을 등지고 있어야 해.
남사친들 : 선배 왜 꼭 그래야 해요?
선배 : 그래야 그 여자한테 온통 너희만 보이게 되는 거지. 그분에게 보이는 건 오로지 벽과 너뿐이도록 하는 거! 그게 포인트야.

선배의 팁을 '분리에 대한 불안'을 끌어올린 후 '외부 세계와 결합'하고 싶은 욕망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해보면 어떨까.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2장 "사랑의 이론"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통한 증명을 '분리에 대한 불안'에서 시작한다.


01. 인간은 왜 불안한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불특정함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으로 분리되어 나오게 된다.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며, 앞으로 맞이할 모든 일에 대한 불확실함이 죽음 말고는 전혀 없다는 사실에 극단적인 개방감을 느낀다. 다행히도 인간에게는 이성이 부여됨으로써 자신의 무력함을 인식하게 된다. 저자는 분리되어 이 세상에 나온 인간이 '결합'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러한 모든 인식을 분리되어 흩어져있는 인간의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또한 '분리 경험'이 인간에게 심한 불안감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사물과 사람들-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는 결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아마 선배가 설명한 "그녀에게 보이는 건 오직 '나'여야만 한다"는 말은 바깥세상에서 단절된 채 오직 한 사람과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게 분리에 대한 불안감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상대 남성에게 '의지'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영화 '페인티드 베일'의 주인공 키티는 어떨까.

영와 페인티드 베일(출처 : 네이버 영화)

02.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에 사랑을 꿈꾼다


사랑의 기술 1 편에서 언급했듯이 키티는 고개를 숙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숙녀라기에는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 영화 초반, 파티장에 등장하면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무언가를 찾는 듯하던 키티, 그리고 장소가 바뀐 후 등장하는 그녀는 부모님과 형제 앞에서 피아노를 치며 대화를 하고 있다. 눈을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한 모습과 피아노 연주를 가족들에게 들려주는 키티의 모습에서 외부 세계와의 '연결성'을 끊임없이 느끼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키티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감옥이자 최악의 처벌은 관계를 맺을 수 없고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없는 환경을 의미한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티는 그간 안정적인 환경이었던 가족들을 떠나 결혼을 선택하게 되는데, 어머니의 냉담한 반응으로 가족과의 긴밀한 연결성이 끊어져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완전히 연결이 끊어지기 전에 급한 마음으로 결혼이라는 또 다른 합일을 찾아 떠나게 된다.


03 연결성을 갈구하는 것


그러나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자 남편에게 말을 붙여보고 눈도 마주쳐보려고 노력하던 키티는 남편의 과묵함과 지루함에 완전한 '합일'을 경험하지 못한다. 키티는 연결되어 있지 못함에 대한 불안감을 성적 도취를 해결책으로 삼으려고 한다.

성적 도취를 해결책으로 삼는 경우는 이와는 약간 다르다. 성적 도취는 어느 정도 분리 감을 극복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이며 고립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이 된다.


결국 키티는 그 후 외도가 발각되고 내연남에게도 버림을 받는다. 도피처가 없는 키티는 남편 월터에게 이끌려 중국의 오지 마을로 오게 된다.


눈을 마주쳐도 하는 생각을 알 수 없고 그렇다고 대화도 통하지 않는 중국인들로 둘러싸였다는 생각에 키티는 하루하루를 절망 속에서 보낸다.

우리는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분리 감이 사라질 때에 완전한 고립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외부 세계도 사라져 버린다.


남편과 중국인 도우미, 경호원과는 연결성을 느낄 수 없다고 판단한 키티는 수녀원에 찾아가 일손을 돕기 시작한다.

현대 서양 사회에서도 집단과의 합일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 목적이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합일이다.

키티는 대면 대면하던 보육원이라는 집단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며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는 키티가 보육원이라는 집단과의 차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종교'라는 장치를 활용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식이며, 우리 모두 인간으로서 똑같이 신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키티와 월터의 연결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갈등을 얇게 펼쳐줌으로써 문제를 가볍게 만들어주어 주인공들이 오해를 풀 수 있게끔 장치를 마련해준다.


오늘날 평등을 일체성보다는 오히려 동일성을 의미한다. 평등은 추상적 동일성, 곧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오락을 갖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감정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월터와 키티는 같은 곳에 출근해서 각각 병원과 보육원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월터의 일은 지루하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만 했던 키티는 밤늦게까지 연구하는 월터에게 저녁을 직접 가져다준다. 키티와 눈도 잘 마주치지 않던 월터는 그녀의 피아노 치는 모습에 추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사랑의 기술'의 함께 일하고 같은 취미를 갖는 것은 완전한 합일을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한다.

완전한 해답은 대 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진정한 사랑을 '공서적 합일'이라고 칭하며 이를 '수동적', '능동적' 형태로 나눈다. 결국 이 두 가지의 형태는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게 된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성숙한 '사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키티와 월터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키티는 월터와 같이 희생적인 사랑과 헌신에 대해 알게 되고 월터는 웃는 방법과 눈을 마주치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된다. 이 둘은 밝고 탐구적인 각자의 장점을 유지한 채 상대방의 긍정적인 부분을 흡수해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있게 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이다.

키티와 월터는 중국 오지마을의 주민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면서 둘의 사람이 점점 풍성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끊임없이 연결성을 확인하고 싶어 하던 키티는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이 주는 행복함을 가득 느끼게 된다. 또한, 월터는 상대의 이야기에 어떻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반응해야 하는지 배워간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영화 초반, 꽃이 일주일이면 시들어버릴 거라 이야기하고, 그렇다고 꽃을 가꾸지도 않는다며 본인의 엄마를 험담하는 키티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극 중 월터는 꽃을 꺾으면 시들어버릴 줄 알면서 꺾어온 후 정성스레 가꾸지 않는 인물로 묘사되고 키티 또한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을 다 하지 않는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보호와 관심에는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 곧 '책임'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책임은, 그 참된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다.

저자는 어른 사이의 사랑에서는 상대방의 정신적인 요구를 잘 알아야 한다고 일러준다. 또한, 상대방을 잘 알고 나서 그 후 생겨나는 '존경'을 바탕으로 진정한 일체가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영화 말미, 서로 사랑을 확인한 키티와 월터는 다시 한번 봉착한 문제에 이렇게 말한다. 이로써 그들이 정말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저자 에리히 프롬은 서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기 위해 사랑의 '행위'를 해나가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동료가 우리에게는 언제가 수수께끼인 것처럼,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언제나 수수께끼이다.


15년 전 나의 친구들에게 사랑의 기술을 전수해줬던 그 선배는 진정한 연결성을 느끼며 사랑하고 있을까.

멀리 갈 필요 없이 나부터가 사랑을 받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진정 상대방을 '존경'하고 있는지, 최선을 다해 상대가 원하는 바를 탐구해나가는 과정을 해나가고 있는가.


이번 기회에 연결성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만 집중하여 상대방을 느껴주고 있기는 하는지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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