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를 닮은 남자

신혼인 우리의 일기

by mamang


남편은 마음 시린 것을 잘 참아내질 못한다.

마망 : 이거 볼까?
오빠 : 아니 이거 말고 기분 좋아지는 거 보자.


힘들게 사는 이웃들이 주인공인 프로그램을 잘 보지를 못한다. 그렇게 속상한 마음이 드는 채널을 만나면 리모컨을 돌리는 손이 바빠진다.

오빠 : 난 이런 프로그램 싫어.
마망 : 왜? 슬퍼서?
오빠 : 슬프긴. 아니거든?


오빠는 슬픔에 취약한 게 분명하다.


우리 할머니도 누가 굶고, 아프고, 울고, 아주 마음 아픈 곤경에 처해있을 때면 어서 다른 데로 돌리라고 성을 내곤 했다.

마망 : 왜 할머니?
할머니 : 징한께. 저런 거 보고 있으믄 징해.


할머니도 슬픔에 취약한 게 분명하다. 할머니와 오빠는 닮았다.




29살 때까지 할머니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뭘까 생각해봤다.


"이노무 상게으름뱅이"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한다" "남의 집 갈 때 빈손으로 가지 말아라" 등이 있는데,


그중에 "이노무 상게으름뱅이"의 빈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반박할 수 없다. 나는 주로 게으른 편이었다. 특히나 가족들 앞에서.


할머니는 오빠와 결혼을 앞둔 내가 사람 구실을 못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오빠의 부모님을 처음 뵙는 상견례 자리였다. 할머니는 상견례 내내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손녀"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사돈 어르신들, 그러니까 나의 시부모님께서는 '아무리 할 줄 모른다고 말씀하셔도 진짜 할 줄 아는 게 없을까' 하시는 눈치였다.


손녀딸 걱정에 온갖 밑밥을 까는 할머니에게 시어머니가 "할머님 이것도 드셔 보세요. 저것도 드셔 보세요." 하신다. 오빠의 엄마, 시어머니는 참 따뜻한 분이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지내고 보니 할머니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오빠뿐이었던 것 같다.


오빠는 할머니처럼 나에게 잔소리를 참 많이 한다. "마망아 이건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놔야지. 마망아 요리를 하고 가스레인지 주변은 이렇게 닦아야 해. 마망아 일어나면 이부자리는 예쁘게 정리해야지" 등등


회사에 다닐 때는 아침으로 먹을 과일을 챙겨주고 영양제를 잊지 말고 먹으라고 독려한다. 회사를 잠깐 쉬고 있을 때는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했는지 오늘 뭘 먹고 뭘 하며 지냈는지 항상 잔소리를 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줌마 같은 오빠라고 놀린다.


며칠 전 오빠와 산책을 했다.

오빠 : 나는 천덕꾸러기 와이프와 살고 있다.
마망 : 천덕꾸러기가 뭐야? 좋은 거야?
오빠 : 으응 ~ 천하의 덕이 많은 사람!
마망 : 응? 뭔가 아닌 것 같은데? 에헴.


오빠는 자주 나를 놀리고 나는 자주 속아준다. 오빠가 잔소리를 하면 나는 종종 입이 대빨 나오지만, 잔소리를 하지 않고 과묵하게 있을 때면 괜히 기분이 좋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할머니와 오빠의 잔소리는 닮았다.




마망 : 할머니 나 누워있는디 에프킬라를 얼굴에 뿌리믄 어떡해잉
할머니 : 안 죽어야. 모구 새끼들한테 뜯기고 싶냐잉.


할머니는 모기가 극성인 계절이 오면 방마다 에프킬라를 뿌리고 다니셨다. 내가 방바닥에 누워있으면 미스트처럼 얼굴 어디 위쪽에 마구 뿌리셨다. 나는 할머니가 에프킬라를 들고 방에 올 때면 이불을 머리 위까지 둘러썼다.


마망 : 오빠 악 내 얼굴에 뿌리면 어떡해!
오빠 : 아니야. 이거 인체에 무해하데!
마망 : 응? 그런 게 어디에 쓰여있어?
오빠 : 이것 봐 "가족 안심" 이래.


할머니와 오빠는 모기를 싫어하는 것도 참 닮았다. 에프킬라가 "가족 안심"이라고 믿는 것도 닮았다.




오빠 : 마망아 물건을 사면 함부로 다루면 안 돼.
마망 : 왜? 아까우니까?
오빠 : 그런 게 아니고, 물건을 함부로 하면 흠집이 나잖아? 그럼 물건에 대한 애정이 떨어져. 그럼 그 물건이 싫어지거든. 그러니까 뭐든지 소중하게 다뤄야 해. 알겠지?
마망 : 알겠어 오빠.


남편은 물건들을 사용하고는 항상 제자리에 두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그 아이들을 소중하게 다룬다. 우리 집의 물건들은 제각기 나름의 쓸모대로 대우를 받는다.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닦여지고 아낌을 받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봐왔던 그릇들은 아직 할머니의 손을 타고 있다. 할머니의 애정이 묻어있는 집안 곳곳의 할머니 물건들은 나에게도 아주 많이 정이 들었다.


허투루 사지 않고 함부로 다루지 않는 할머니와 오빠의 태도가 참 닮아있다.




돌이켜보니 오빠는 할머니를 닮았고, 시어머니도 우리 할머니를 닮은 것 같다.


한 번은 어머니께서 우리 할머니의 옷 치수를 물어보셨다. 겨울이 곧 다가오니 할머니의 조끼를 뜨개질로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어머니의 엄마가 생각난다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 몰래 할머니의 옷 치수를 알아다가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수개월을 내내 공들여 예쁜 조끼를 선물해주셨다.


마망 : 어머니 솜씨 너무 좋으시다 오빠.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실 것 같아.
오빠 : 엄마가 몇 개월 동안 내내 뜨개질을 했나 보더라고. 별건 아닌데 할머니가 좋아하시면 좋겠다.
마망 : 당연히 좋아하시지. 우리 할머니가 나 어릴 때 모시옷도 직접 바느질해서 만들어주고 그랬는데. 그때는 친구들이 막 놀리고, 나도 아저씨들이 여름에 입는 옷 같아서 창피했거든? 근데 지금은 그게 되게 그립다?


어릴 때는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시는 옷들이 창피할 때도 많았다. 할머니는 매 여름마다 풀을 매겨서 빳빳한 모시옷을 준비해놓으셨다.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나 어릴 적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시어머니의 선물을 열어본 우리 할머니는 목이 매여 말을 잘 못했다. 그냥 "이 늙은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 귀한걸. 세상에." 하시면서 조끼를 입고서는 도톰하고 거친 손으로 스윽스윽 쓰다듬었다.


어머니는 조끼를 만드시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 우리 할머니는 떠올려주셨을까. 수개월의 공로가 담긴 조끼를 나에게 전달하시면서 "진짜 별거는 아니야. 할머니가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전달해주라.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고 꼭 말씀드리고."


시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할머니의 마음과 닮았다.




할머니는 손주들이 바쁘지는 않을까 전화를 자주 하지 않으신다. 며칠 전에는 집에서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할머니가 내 꿈을 꾸셨다고 전화를 걸어보라고 엄마에게 시키셨단다.


마망 : 할머니 ~ 왜? 무슨 꿈 꿨는데?
할머니 : 아니 그냥. 꿈에 계속 니가 나오고. 방에 가만히 누워있다가 무슨 소리가 들리믄 니 목소리 같고 그래야. 아가 별일 없지야?
마망 : 응 할머니 별일 없어. 걱정 마셔. 식사는 하셨어?
할머니 : 했제. 약도 잘 챙겨 먹고 그래라잉.


아흔이 넘은 우리 할머니는 30대 젊은 손녀를 걱정하신다. 어서 추석이 오면 좋겠다.


할머니를 닮은 내 짝꿍의 손을 잡고 할머니 보러 가야지. 할머니를 닮은 우리 시어머니께는 뭘 사갈까 오늘은 가족회의를 해야겠다.(회의 구성원은 오빠와 나 2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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