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캠프에서 작업자들과 같이 숙소생활을 하며 동료의식을 느끼겠다던 의지는, 더 이상 그들과의 불협화음을 견디지 못하고 1 캠프로 이동시켜 달라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방을 내주었다. 2캠프의 방글라데시,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의 외노자들과 한국인 작업자들로 인해 넘쳐날 것 같던 생활과 달리, 1 캠프로생활은 그야말로 안락한 삶이었다. 노래방, 도서관, 만화방, 탁구장과 당구장, 사우나실, 헬스클럽까지의 편의시설을 적은 인원으로 여유로웠다. 뿐만아니라, 1인실을 사용하는 숙소와 내부 화장실 하며 복지까지도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작업자들과의 동료의식을 느끼겠다고, 부족한 화장실과 욕실, 삭막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같이 생활하겠다고 관리자 캠프로 오라는 것도 사양하고 버텼으나 그들과의 불협화음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 캠프로 온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같이 생활하던 노동자들이 패거리로 공격하다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자,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들을 같은 마을의 이웃과 형제처럼 여기던 내 마음은 서늘하게 식었고 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형님, 그것 보세요. 노동자들한테 잘해줘 봤자, 돌아오는 것은 배신 밖에 없어요. 우리도 잘해주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엔 꼭 업신여기고 배신해서 명백한 선을 그어 놔야 한다니까요!"
쉬는 날이면 바닷가에 나가 수영을 하기도 했고, 일주일 업무를 마치는 목요일 저녁엔 캠프에서 관리자들끼리 모여 바닷가를 바라보며 바비큐 파티를 하거나, 식당에서 회 같은 음식을 주문해서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관리자들은 좀 개인적이며 이기적이긴 해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존중은 이어졌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야비한 행위에 엮이지 않게되었다고 좋아했다. 비로소, 내 다리를 붙잡고 모지리 같이 기세 등등하던 노동자들을 내려보는 관리자의 시선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 중에서도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많았다. 그들에게 깍듯한 예의와 즐거운 유대관계를 잊지 않았다.
1 캠프 뒤의 지중해와 저 멀리 보이는 타이타닉 레스토랑과 호텔
하루는 점심시간에 캠프 바로 앞에 위치한 타이타닉 레스토랑 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옆의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한 무리의 프랑스 사람들을 발견하고 면면을 살펴보는 와중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무리 보아도 분명 아는 인물이 맞았지만 예전에 비해 살이 찐 것이 긴가민가해서 같이 식사하는 사람에게 조용하게
"저 사람 외인부대 출신 아닌가요?"
하고 물어보니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프랑스어를 하자,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해서 재차 물어보자 역시 알아듣지 못했다. 그 사이 이쪽의 소란을 눈치챈 그가 얼굴을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면서도 긴가민가했던 내가 "당신 외인부대 출신 아닌가요?"라고 묻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오, 준! 이게 누구야! 세상에 한국 기업이 여기 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네가 여기 있을 줄이야!"
그는 오귀스탕이라는 레위니옹 섬 출신의 외인부대 동료였다. 성격 좋고 남자답고 밝은 친구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제2 외 인보병 연대 영창에서였다. 술 마시고 사고를 치고 들어왔던 그는 꿈꾸듯이,
"제대를 하면 마르세유에서 수중 잠수를 배워 세계를 다니며 돈을 벌 거야. 생각해봐 준! 세상을 돌아다니며 돈도 벌고 여행도 하면서 일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큰 땅을 사서 과수원을 하는 내 모습을!"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꿈을 이루어 알제리까지 온 것이었다.
나는 그를 삼성 캠프로 초대해 숙소와 캠프로 안내해주었다. 그의 팀은 삼성 프로젝트와 연관되어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목요일 파티가 있는 날, 그를 숙소로 초대해 같이 파티를 즐겼다. 세계 어디든 외인부대원이 있듯, 알제리에서 만난 우리는 영창에서의 악몽을 추억으로 만들었다. 그는 급여로 천만 원을 받는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프랑스에서 천만 원은 세금 포함, 회사 측이 그만한 복지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실상은 억대 연봉이 넘었다.
그의 팀들은 외인부대처럼 각국의 잠수인력들로 구성되었다. 프랑스인들에 비해, 75%의 급여만 지불해도 되는 폴란드나 루마니아 등, 다른 동구권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장은 젊고 세련된 친구여서 우리 둘은 월급 많이 안 주면 바다에 빠트려 물 좀 먹이자고 사장이 있는 앞에서 외인부대원 다운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캠프 내에, 자신이 외인부대원이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한국인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안전 담당자를 만나러 갔을 때, 협력업체에 외인부대 출신이 있다는 얘기를 해 준 적이 있어 누군가 궁금해서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외인부대 출신이 아니었다. 자대가 어딘지도 모르고 교육대가 어딘지도 모르는 거짓말쟁이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관리부장과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에게도 직접 찾아가 거짓말하고 다니면 코피 난다고 경고를 했음에도 그의 거짓말은 계속되었다. 삼성 관리자들도 모두 속아 넘어갔는지, 삼성의 도움을 받아 알제리에 회사도 열고 면허증도 알제리 걸로 얻어 운전을 하고 다니는 능력을 가졌다고 관리부에서 하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루는 그의 방으로 찾아가서 헛소리를 하는 그의 따귀를 때리며 남들에게 무슨 사기를 치든 상관없지만 외인부대 출신이라고 한 번만 떠벌리면 공식적으로 조져 준다고 엄포를 놓자, 다음부터는 슬슬 나를 피했던 얘기였다.
거대한 가족이라는 외인부대원으로써의 자부심은 내게 있어서 충성심이나 명예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 있어서 외인부대는 존중과 명예로 거대한 연대로써 프랑스를 배우고, 프랑스 문화에 동화된 것에 대한 자부심에 있었다. 외인부대는 수직적인 계급이긴 했어도 우리나라처럼 을 차례를 함부로 하거나 무능한 자가 쉽게 진급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프로페셔널한 군대답게 훈련과 대우에 따르는 복지는 자랑스러웠다.
책임을 져야 하는 매니저인 팀장과 소대장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더 책임감이 강하고 솔선수범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때려서 죽이거나 왕따로 전우애를 상실하게 하는 한국 군대, 더욱이 온갖 비리로 군인들의 생필품과 군용품을 해쳐 먹는 한국 군대와 다른 시스템이 명예로운 것이었다.
오귀스탕이 프로젝트를 끝내고 떠나기 전까지, 우리는 그들끼리 즐기는 바에서 자주 만났다. 한국인들은 모르는 그 바는 캠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캠프 주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담하고 정감이 가는 바에 히잡을 쓰지 않은 미녀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만남은, 거대한 패밀리의 추억을 남겼다. 오귀스탕이 결혼한 후, 아이를 가지고 가족을 이룬 것에 대해 순진한 아이처럼 자랑하는 그의 순박함에 감사했다.
잘 정리된 생활 캠프
내가 만들어 낸 공문서를 친절하게 수정해주는 공무팀의 소 은경 과장에게 타이타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대접했다. 그녀는 이미 애인이 있었으므로 딴마음을 품지 않은 순수한 저녁 모임이었지만 그녀는 삼성에서 받는 급여와 소속감을 자랑으로 삼았다. 과연, 과도한 업무만 아니라면, 삼성엔지니어링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은 자랑스러울만했다. 어느 곳에서 일하든, 내가 필요하지 않은 곳이라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된 나와는 다른 마인드였다.
급여가 아무리 많아도 환경이 따라주어야 했고 주변 사람들에 민감한 대신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 번 들어가면 그곳에 뼈를 묻을 것처럼 충성을 다하는 것이 나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삼성엔지니어링은 일을 많이 시키는 것 외엔 나무랄 데 없는 시스템이어서 직접 계약만 한다면 얼마든지 일해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해안로를 지키는 경비가 안내해주는 경로를 따라 캠프 내로 들어가서 바로 헤어졌다. 여자들만 가는 숙소로 그녀를 보내고 토목 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경비 하나가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뛰어가 그를 잡고 보니 약을 했는지 눈빛과 행동이 어색했다. 당장 총을 뺏고 경비실로 데려가 경비 대장을 불러 곧장 교체 지시를 하고 해고하라고 지시를 했다. 물론, 그럴 권한이 없었다.
캠프는 도둑이 들끓었다. 모두 경비업체나 청소업체, 한인 캐터링 업체에서 고용된 현지인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현지인들끼리 거의 캠프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둑은 잡기 힘들었고 같은 일은 계속 일어났다. 캠프 관리를 한국인 업체는 관리자만 한국인일 뿐, 거의 모든 시설관리와 보수를 현지 업체에 하청을 주었기 때문에, 모두가 일하러 간 텅 빈 캠프는 못된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방으로 침입이 가능했다.
방문을 잠근다 한들, 청소를 위해 들어가는 여자들을 관리할 경비는 부족했고, 경비와 청소부가 작당하면 도둑은 막을 길이 없었다. 더욱이, 가건물이 창문은 그냥 들어내도 무방비였기 때문에 대책이 필요해 보였다.
식당에는 젊은 남녀들이 같이 일하고 있었다. 나이가 좀 지긋하면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그나마 프로페셔널한 서비스를 기대해 볼만했지만 모두 젊은 남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언행은 거칠었다. 용기인지 객기인지, 한인들에게 위협적인 언행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에 혀를 찼다. 캐터링 회사가 따로 교육을 시킬 여력이 없어 보였다.
직원들 중엔, 키르키스탄이란 곳에서 온 여자들도 같이 알제리 젊은 친구들과 같이 일하고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철저한 이슬람 율법이, 고려인 같아 보이는 키르키스탄 젊은 여자들에게 스킨십이 과하게 보였다. 그들의 교육과 관리가 부실하고 서비스의 질도 부실하다고 여길 정도로 건들거리는 친구들이 식당을 주름잡고 있었다.
캐터링 회사에 위임해서 개입할 여지가 없었지만,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을 마구 만지고 여자들이 거부하지 않고 또한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는 낯 뜨거운 광경이 스스럼없이 일어났다. 나의 오지랖은 더 이상 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캐터링 관리도 캠프 관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가 심각해 보이는데도 아무도 개입하지 않는 일에 나도 개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볼수록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