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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Apr 20. 2020

코로나 때문에 거부당한 구치소 썰 5

판사 #2



“행님~”

“와?”

“오딥니꺼?”

“북한산이다”

“서울 올라왔어요?”

“하모~(‘그래’의 서부경남 사투리)”

“그럼, 오늘 시간 되시면 사무실 들르세요”

“오딘데?”

“고등법원요”

“거가 어디고?”

“서초 중앙법원 옆에, 예전에 와봤다 아입니까? 그 옆에 있어요”

“알았다. 가서 전화하꾸마~”


 서부경남 사나이들 답게 우리의 대화는 간략했다. 파주에 들러 등산으로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나 점심을 먹고 곧장 중앙 지법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한적한 거리와 서초 법원 주변은 한가했다. 후배는 고등법원 입구로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땀에 젖은 셔츠에서 후덥지근한 땀냄새가 났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후배는 간편한 등산복 차림의 짧은 바지, 땀이 흐른 셔츠를 보며 핀잔을 줬다.


"사람 참 안 바뀌네"

"넌 바뀌는 게 좋냐?"


 사무실 입구에는 부장 판사라는 문패가 적혀 있고 직원 사무실을 지나야 판사 사무실이 나타났다. 판사실 창문으로 서리풀 공원과 서울 회생 법원 건물이 높은 아파트 사이에 자리 잡았다. 재작년인가...... 한 번 왔을 때, 손 짓으로 가리킨 곳이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는 다른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그 뒤편으로 용산 서울 타워를 북한산이 감싸고 있는 풍경이 멋졌다.


 후배는 커피와 다과를 꺼내놓았다. 언제나 업무에 매달려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해 고향 근처로 가고 싶어 하던 바램과 업무적인 성과 사이에서, 둘 모두에 철저하게 시간을 분배하고 검소한 평범함이 권위주의의 산실인 법원 판사라는 직업이 어울리지 않았다. 후배의 열정적인 삶이 밤늦게 업무에 매달리는 일이 많아도 제 삶에 충실한 모든 사람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말도 없이 일에만 몰두하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런 열정 덕분으로 부장 판사가 되었으니 잘 된 일인지는 몰라도 여유를 가졌으면 싶었다.


"파리 영재 형님이 들어와서 최근에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을 듣고 실소를 날렸다. 영재는 파리 베르사유 박람회장 근처에서 식당을 하던 동생이었다. 자주 찾아가 저녁을 먹고 가족끼리 여행을 간다고 텐트를 빌려주었는데, 장비를 잊어먹고 돌려주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사글사글하고 흥겨운 친구이기도 했다. 그에게 프랑스 국적을 신청하기 위해, 주소가 필요해서 주소를 쓸 수 있겠냐는 부탁을 영재가 거절했는데, 친구들과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에게 전화한 것 불쾌하니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전해 들은 것이 어이없어 재수 없는 놈이라고 여겼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최근, 진짜 북한 난민에게 식당을 넘겼는데 잔금을 다 받지 못하고 곤란함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들어 일부러 식당을 찾아 간 적도 있었다. 북한 사람은 그를, '머저리 천치 같은 놈'이라 욕했다.


파리 1구, 시테 섬에 위치한 법원(Palais de justice) 정문. 생 샤뻴 성당과 마리 앙뜨와네뜨가 갇혔던 꽁시에르주리가 같이 있다.



 프랑스 파리에선 조선족들이 북한 난민으로 신청해서 터를 잡았고 교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아는 북한 난민은 식당을 운영한 그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북한 난민으로 영주권을 취득한 모든 조선족들의 경계의 대상이자 적이었으며 한인 교회와 카르텔을 형성한 조선족들 틈 사이에서 진짜 북한 난민은 환영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독실한 교회 신도인 한인 사이트 '프랑스존' 편집자 이 성수도 북한 사람은 '양아치'라는 한마디로 증오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후배는 영재의 얘기를 들었을 것이고, 첫 대화부터 교활함에 따귀를 맞은 것처럼 기분이 상했다. 영재가 보여주던 두 딸의 귀여운 모습과 겹쳐 신뢰와 애정을 도난당한 상실감에 화가 났다.


"형님은 요새 뭐합니까?"

"글쎄, 선주사 물량 계약 맺으려 이리저리 만나고 있고 안되면 조선소 들어가서 일도 해. 하다보니 다들 근로기준법 위반을 하길래, 신고 좀 했더니 처리가 빠르더라!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더라!"

"내가 보니까, 행님은 어디 가서 월급쟁이 생활은 못할 거 같은데, 경제 활동이 됩니까?"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핀잔을 주듯이 물었다. 그 모습에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권위를 느꼈다.


"그래 보이지? 한국 사회는 내가 적응하기 힘드네, 사회 부조리도 많고 체계도 그렇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떡하든 사회에 적응해서 성공해야지, 형님처럼 사회 부조리니 사회정의를 따지니 사회 부적응자 소리를 듣기 딱이지요!"


 얘기를 듣자 저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경찰과 검찰이 꾸민 조서와 증거를 보고 판결을 내리는 형사나 민사나 정작 누가 진실이고 누구 위선자인지 진짜를 구분하기 힘들 것이기에,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들은 알고 보면 진실이 은폐된 권력형 비리와 전관예우로, 범죄자를 피해자로 만든 무전유죄 유전무죄 판결이 지면을 장식하는 일이 한 둘이던가!


 하물며, 저런 사회 인식으로 부장판사 자리를 꿰차고 앉아 판결을 내려, 형이라 부르면서 죄인 훈계하듯 하는 말이 가당치도 않았을뿐더러, 정작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닌가! 한국의 조선소, 건설현장은 불법과 편법, 근로기준법 위반과 인권 유린이 매일매일 일어나는 몰상식의 세계였는데, 그런 현장을 경험해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현장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을 인식이, 자신의 상식과 법의 테두리 속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업신 여기고 있음에 화가 났다.


 속에서 끓어오른 화는 분노의 눈길을 띄었고 그 시선을 그대로 담아 후배를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단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지만 이미 일반인의 상식을 넘어버렸다고 판단됐다.

 

"그러니까 너는, 지방노동위원회를 통해 천만 원이 넘는 보상금을 받았는데,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라고 판사가 말하는 거냐? 이거 기분 나빠서 같이 얘기 나눌 수 있겠어? 나 갈란다. 앞으로 연락하지 말고 판사질 똑바로 해라!"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거제도로 돌아가는 내내 버스에서 불쾌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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