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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Feb 10. 2019

갑질 천국, 헬조선 블루스 1부, 조선소

조선소, 세진 중공업, 현대 중공업, 삼성 중공업


1, 세진 중공업


세진 중공업 현장


 팀장이라는 사람이 기분 좋게 나를 맞았다.

처음 와 본 울산 방어진 시내버스 종점 근처였다.

그가 요구한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숙소 배정을 받았다. 현대 중공업 안전화와 작업복이 어질러져 있는 거실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이전 사람이 쓰던 거라며 매캐한 냄새가 나는 이불과 베개를 꺼내 주고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좁은 방에 세 명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무작정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무료하던 나는 조금만 내려가면 만나는 바닷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망중한을 즐겼다.


 입사에 필요한 배치전 건강검진과 이력서, 주민등록 등본과 가족 관계 증명 서류를 제출하고 일주일여 지나자 현장이 바뀌었다며 세진 중공업으로 이동했다. 기량자라는 30대가 두 명, 초짜 20대가 두 명, 60이 다 된 초짜와 나 포함 6명이었다. 다시 일주일간의 대기 끝에 안전교육을 받고 바로 발판 해체 현장에 투입되었다.


 사람 좋던 팀장이 단 번에 얼굴 빛을 바꾸고 반말과 욕설이 오가는 작업지시가 이뤄졌다. 

작업은 쉴 틈 없이 위에서 아래로 비계(족장; 이하 족장)를 전달했다. 손치기라 했다. 빗물과 페인트, 쇳가루가 묻은 족장은 쇳가루가 쏟아지고 밑에 있는 사람은 고스란히 온 몸으로 쓰레기를 맞으며 특수 장갑은 금방 달아 맨손이 드러났다.


  죽기 살기로 일하겠다는 일념인지, 작업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조선소의 휴식 시간은 오전 4시간 중에 10분, 오후 6시 퇴근시간까지 10분 휴식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노동에 바치면서 그 시간과 업무량을 통제당하고 감시당했다. 그 통제와 감시는 바로 팀장이 행했다. 팀 단가라는 것으로 협력업체의 물량을 받기 위해서. 


 팀장은 당연히 함께 일하는 몇몇의 팀원이 있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인터넷을 통하는 모양으로 내가 딱 그 케이스였다. 팀장은 물량을 받아야 하는 특성상, 협력 업체 사람들에게 아부와 아첨에 능했고 실력도 물론 뛰어나야 했다.


 족장(발판, 비계)을 하는 사람들 모두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일을 참 잘한다고 생각했다.

오죽했으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150% 이상의 능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넘어서, 나에게도 자기들만큼 잘할 것을 요구하며 가만히 서있지 말라던가, 손을 어딘가에 기대고 서 있거나 팔짱, 혹은 뒷짐을 지고도 서 있지 말라고 했다. 잠깐 동안 서 있을 때, 업무강도 때문에 넋이 나갔다. 그러면 곧장 넋 놓지 말라는 고함이 들렸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이것은 일반적인 범주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적인 충격을 너무 많이 받는 시간들이었다.


 나이 44, 체력은 누구보다 좋았다. 

힘과 체격 조건도 누구보다 뒤지지 않아 힘쓰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그러나 업무의 강도는 마치, 가진 모든 체력을 고갈시킬 정도로 높았다. 아침에 잠깐 만나 인사를 나누는 같은 회사 사람들은 각각 반을 나눠 헤어지고 나면 점심때나 혹은 퇴근 때, 탈의실에서 얼굴 잠깐 보는 게 다였다. 서로 간의 인간적인 교류는 없이, 여유도없이, 피곤한 얼굴로 만나는 아침의 얼굴과 하루 종일 땀을 쏟아내고 만나는 저녁의 피곤한 얼굴 속에 깃든, 가장에 대한 의무감과 업무에 대한 책임감 속에 권한이라곤 없는 힘 없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씨익 웃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아침 조회를 하는 소장은 협력업체 사장 동생인지 뭔지, 친척이라고 했다. 그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안전 조심하라는 얘기 같았는데 모두 다, 알아서 서로서로 조심하라는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 얼굴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는 이런 지옥같은 작업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악당 책임자였다.


 야간 잔업이 이뤄지는 날이 잦았다. 

참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팀장의 요구가 있어 참여했다. 세진 중공업은 현대인지 삼성인지 하청을 받아 데크하우스(거주구역)만 전문으로 만드는 업체라 했다. 데크 아래로 나 있는 조그만 구멍을 통해 사람들이 올라 갔고 그 곳으로 철거한 족장을 꺼내 주었다. 데크 안은 모두 막혀 있었는데, 그런 곳을 조선소에서는 밀폐구역이라 했다. 


 그 밀폐구역에 들어가 족장을 해체하던 사람들은 모래처럼 쏟아지는 쇳가루와 먼지, 분진가루를 고스란히 마셨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보안경에 서리가 끼었기 때문에 마스크를 벗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 보고 거기 들어가서 일하라고 하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도 죽어라 일했고 안전의 기본인, 쾌적한 환경이나 복지를 기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곳은 지옥 같은 곳이었고 그나마 일할 수 없으면 쫓겨나야 했기 때문에!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자, 노예가 된다]


 사람들은 권리와 권한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게 개돼지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이 지옥같은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OECD 국가가 아니던가! 한국은 국제 노동 기구(ILO) 가입국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작업환경과 업무 시스템이 가능한가! 나의 의구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족장이 위로부터 후드득 떨어졌다. 손치기로 알려진 작업은 난이도가 아주 어렵고 손아귀나 팔에 힘이 없으면 미끄러질 수 있어 밑에 있는 사람이 다칠 수 있었다. 그런데 야간 작업으로 이뤄지는 손치기는 두어 시간 내에 쳐 낼 물량을 주는데 그 속도가 마치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그 어떤 안전조치도 이뤄지지 않고 작업을 진행했다.


 후드득 떨어진 족장을 치우다가 머리와 몸에 몇 번 맞았다. 업무를 지시한 관리자는 현장에 없었다. 믿을 것은 오로지 각 작업자들의 능력뿐, 선박의 데크하우스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세진 중공업은 특성상, 선원들의 거주구를 만들어야 하므로 좁은 데크 안으로 들어가서 족장과 파이프, 클립 등을 빼내야 하는데 바람이 통하지 않아 해체하는 족장에서 떨어지는 쓰레기와 쇳가루 먼지를 온 몸으로 맞아가며 작업할 수밖에 없는 악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안전 요원이나 감독관 없이 작업이 이뤄졌다. 원체 빨리 해체 물들이 내려왔으므로 작업을 하다가 족장에 맞기가 일쑤였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다 보면 서로서로 말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싸우다 서로 꼴 보기 싫다며 가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사람들 간에 인간 존중이라던가, 협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당을 많이 받는 사람과 일을 시키는 사람, 관리가 아닌 노예나 죄수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계약서라고 작성했지만 직장이라는 생각도없이 그저 왔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 수 있게 구성된 업무 시스템과 애착이 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하루 10만원 정도의 일당에 맡겨진 열악한 환경! 작업자들은 그 쇳가루먼지 속에 보안경을 쓰면 습기 때문에 벗어버리거나, 심지어 마스크도 벗어버려 그 먼지들을 오롯이 마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런 불만 없는 사람들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활에 너무 놀라웠지만 그렇게 묻어갔다.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나면 퇴근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달콤한 휴식을 취해야 했지만 숙소는 방이 아니라 거실을 썼다. 팀장과 같이 일하는 기량자라는 어린 두 친구가 에어컨이 있는 넓은 방을 사용했고 나보다 나이 많은 분과 나는 거실을 썼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런 줄로만 알고 조선소 환경이 열악하다 못해 지옥 같구나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가 끝나고 그나마 쉬운 설치 작업이 주어졌다.

같이 거실을 사용하는 술 좋아하고 사람 좋은 손위 작업자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힘들 때마다 위험해 보여 강가에 내 놓은 것처럼 불안했는데 어느 날 간다는 소리도 없이 가버리고 새로운 20대 두 명이 들어왔다. 체격이 좋은, 생생한 친구들이었다. 


 아는 체도 인사도 없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처럼 같이 일했다. 그러다가 강원도 강릉에서 온 싹싹한 해병대 출신 친구들을 만나 죽이 맞았다. 일은 힘들어도 즐기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식사 때나 퇴근 버스에서 만나면 즐거웠다. 우리는 방어진의 현대해양 쪽으로 가자고 협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 중에 허리를 삐끗 했다. 조그만 파이프를 줍다가 그만 주저 앉았는데 처음 당하고 보니 황당하고 움직일 수 없었다. 반장인지 트럭에 나를 실어 병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담배를 피워 무니, 담배를 필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했다. 병원에서도 집에서 몇 일 쉬다 보면 나을 거라고 했다. 누우니 화장실을 못 갈 정도로 꼼짝을 못할 지경이었다. 산재 처리를 해달라고 사측에 요구했다.


“어이, 지금 회사 엿 먹이려고 작정했나?”


 작업자들 얼굴도 보지 않고 말하던 소장이 반말과 더불어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화를 냈다. 그러자 일을 마치고 돌아온 팀장이 숙소에서 쫓아냈다. 쫓겨 나 곧장 큰 병원으로 가서 입원했다. 해병대친구들이 도와주었다. 나는 병원에서 2주를 입원했고 산재처리를 위한 절차를 밟았다. 노동청에 신고를 하고 산재에 따른 병원비와 일을 못하는 비용을 청구했다.


그러나, 비용 청구는 온데간데없고 병원비만 사측에서 내 주는 것으로 근로감독관의 업무처리는 완료되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으나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정보를 구할 수도 없이 퇴원을 하자 마자 해병대 친구들이 옮긴 현대 해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바다가 바로 보여 전망도 좋고 꽤 넓은 아파트였다. 그러나, 거실에서 자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불과 배게도 개인이 샀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2.  현대중공업(HHI)

현대중공업 방어진 해양플랜트 제 2 공장



 업무 환경은 세진 중공업보다 훨씬 좋았다. 이번에는 모듈 만드는 작업이라고 했다. 기량자라고 불리는 기술자가 작업을 하는데 필요한 자재를 찾아 올려주면 되는 일이었는데 힘든 일 없이 편했다. 그런데 항상 무엇이 필요할 지 몰랐기 때문에 밑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팔을 짚고 기대어 서 있지 말라고 했다. 팔짱을 끼지도, 뒷짐을 지지도 말라고 했다. ‘감독관’이냐고 나무랐다. 작업에서 꼴 보기 싫은 것을 그들 입맛대로 요구했다.


 즐겁고 행복한 작업장은 없고 군대 같고 눈치 보며 갑질 하는 현장이었다. 오로지 작업, 필요한 물량을 만들어 내거나 그 이상을 보여주어 다음 물량을 따 내어야 하는 물량 팀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었다. 인간적인 존중은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기준에 맞아야 일을 잘 하고 아니면 쫓아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존중도 없이 오로지 갈굼과 왕따로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일을 위한 팀이 아니라 마치 최고의 일하는 기계나 노예화된 정예병을 만들어 내려는 것처럼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준비하는 조공(작업 보조 직원)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또 다른 물량을 얻어 살아남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자기보다 일 머리를 모르는 사람을 착취하고 인권을 유린해 가며 착취 당하는 자로써 착취하는 인생 제일 밑바닥의 하류인생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침 조회에 반장이라는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고 조회를 이끌어 나가면서 하는 말에 호응이라도 해주거나 기분 좋게 농담이라도 던지면 


‘감히 반장 얘기하는데 어디서 그렇게 배웠냐?”


 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의 노동자 사회가 이랬던가? 이런 지옥 같은 생활이었던가? 자신들이 그렇기 때문에 모두 그러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로 무장한 기량 자들이었고 의무였으며 명령이었다. 나는 이들이 일을 잘 한다는 생각도, 열심히 한다는 생각도 지웠다. 단지, 눈치껏, 팀의 이익을 위해, 욕을 얻어 먹지 않기 위해 스스로 노예화된 자들이라는 생각이 시간이 갈수록 확고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해병대 친구들은 일을 마치면 가난한 마음에도 즐겁게 지냈다. 같은 고향 친구들이라 어려운 일에도 의지하며 즐거운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이 팀들 중에 술만 마시면 결근을 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있었다. 결근을 자주해서 잘렸다.


 리더 격인 친구가 싹싹하게 임금 협상도 하고 친구들을 통솔해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팀장이 이 친구를 자르려고 친구들 와해 작전을 쓴 모양이었다. 즉, 다른 친구들에게 돈을 더 줄 테니 리더 격인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팀에서 나가게 해달라는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그렇게 고향 친구들에게, 그리고 해병대 친구들에게 그 친구는 버림 받고 나도 같이 그만두었다.


 험하게 자라고 험하게 자란 사람들을 많이 보아 온 탓인지 사람들이 거칠다 못해 무지몽매했다. 자신들에게 돌아갈 칼날을 잠깐이라도 우위에 점했다 싶은 순간 참지 못하고 휘둘렀다. 인간적인 예우와 가치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현대 중공업에선 아무런 개입 없었다. 사람들이야 들어오던 말던, 현장에서 어떤 인권유린이 일어나고 패륜적인 행위가 일어나도 기술자 우선이었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위대했고 어떻게 해야 살아 남을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동지애도 느낄 수 없었다. 원수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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