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박 8일 서유럽여행 (07/25)
단테가 피렌체로 돌아온단다.
피렌체에서 점심을 마치고 첫 유적지는 산타 크로체(Santa Croce, 1422년) 성당에 다다랐다. 산타 크로체 성당은 1442년. 148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된 '성스러운 십자가'로 해석되는 이름을 가진 성당이다. 일단 첫눈에 깨끗하고 밝은 대리석으로 꾸며졌다는 느낌이 강한데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이 성당 지하에는 피렌체 출신의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작곡가 로시니 등 거의 유명인사 묘소 대부분이 있다. 정작 산타 크로체 성당을 지키는 동상이자, 피렌체의 대표 인물인 단테의 묘소는 있지만, 유골이 이곳에 없다는 아이러니. 그는 피렌체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라나?
단테 (Alighieri Dante, 1265~1321)는 피렌체 사람이다. 신곡(神曲, Divina Commedia)의 작가이기도 하지만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피렌체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다투던 신성로마제국과 로마 교황청 사이에서 피렌체를 독립시키려는 운동을 펴다가 1302년 교황 세력 집권 후 추방당했다. 그 당시 피렌체 의회에서는 '단테를 추방하고 프렌체로 돌아오면 화형에 처한다.'라는 판결을 받고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고향을 떠난 망명 생활 속에서 신곡을 썼다고 한다. 단테는 1321년 이탈리아 북동부 라벤나에서 사망했고, 이 때문에 그가 동상으로 지키는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무덤 안은 비어 있다고 한다.
2008년 6월! 피렌체 시의회에서는 1302년의 판결을 취소하고 단테에게 시 최고 훈장을 추서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는 700여 년만의 복권이고 환영할 만한 일지만, 단테의 유골이 라벤나에서 되돌아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아무튼, 산타 크로체 성당은 피렌체와 단테를 잇는 가교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가짜를 논할 새가 없다. 줄을 서시 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산타 크로체 교회를 지나서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정신없이 걷다 보니 정말로 5분 만에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에 들어섰다. 맨 먼저 좁은 골목길 안쪽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쉽다면 이 광장 곳곳에 수많은 조각품 모두가 모조품들이라는 것. 그러나 모조품이라고 문제 될 것은 아닌 듯. 가장 인기 많은 다비드(David)상 앞에서 줄을 서서 사진 찍을 순서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피렌체에 와 있는 것을 실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비드는 구약성서 사무엘서 17장에 나오는 골리앗을 죽인 16세 소년으로, 도나텔로, 베르니니, 미켈란젤로 등이 조각하였으나, 그중에서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다비드상을 최고로 칭찬하고 있다. 이 조각상 역시 대리석 하나에 모든 조각이 담겨 있다. 이 다비드 상 또한 모조품이라고 한다. 진짜 다비드상은 오염을 막기 위해 이미 130년 전에 아카데미아 갤러리 안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사진 설명 : 시뇨리아 광장. 가장 많이 등장한 조각상은 바다의 신 넵투누스 상. 그리고 맨 아래 가운데 말을 탄 모습의 청동 조각상은 피렌체의 명문가 메디치 상]
돌덩이 하나에 역사 전부를 기록한 '사비니 여인 약탈' 상
그중에서도 한눈에 심장을 관통한 듯 큰 아픔과 함께 충격적으로 다가온 조각상은 역사를 조각으로 만든 지오반니 볼로냐(Giovanni Bologna)의 사비니 여인 약탈(The Rape of The Sabine Women)였다.
지난 1583년 이전에 조각되어 4백 년을 넘게 서 있는 이 동상은 크기 4.11m의 커다란 작품이지만, 슬픈 역사 전부를 단 하나의 돌덩이에 단 세 사람의 표정과 행동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또 한 번의 큰 감탄을 감히 감출 수 없었다. 여자를 약탈하는 로마 병사와 겁에 질린 여자의 얼굴과 약탈자를 막으려고 항거하는 약하디 약한 시아버지의 표정이 비극을 정말 잘 표현한 이 조각. 바로 앞에선 우리는 모두는 예술성에 넋을 잃고 말았다. 예술에 (지식부터 감각까지 모두) 빈약한 나에게 ‘이런 것 예술이구나.’라는 큰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이 조각에 담긴 슬픔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더구나 이 조각상이 단 한 덩이의 돌덩이로 표현된 것이라고 하니 그 노고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비니 여인의 약탈'이라는 비극은 다른 무엇보다 전쟁이 남기게 되는 비극과 허무와 무의미함에 대해 떠올리게 했다.
[사진 설명 : 씨뇨리나 광장에 서 있는 사비니 여인 약탈 조각상 (1583년). 지오반니 볼로냐 작]
사비니의 약탈 얘기는 이렇다.
"로마의 전설적인 건국의 아버지 로물루스(Romulus)는 자기가 건설한 새 도시에 인구가 부족하자 노예든 방랑자든 원하는 사람 모두 로마 시민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새로운 로마 시민은 여자보다 남자가 많았다.
몇 년 후 인구의 불균형으로 로마에 여인들이 부족해졌다. 여자들이 부족함에 따라 결혼 적령기 남자들의 원망이 많아지자 로물루스는 이웃 사비니 족을 습격해 여인들을 약탈해 오기로 마음먹는다. 로물루스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Neptunus) 축제를 열고 사비니족들을 초청한다. 로마의 군인들은 시비니 족 남성들이 만취하게 하고 축제에 온 여인들을 강탈하고 나서 사비니 남자들을 쫓아버린다.
로마의 역사가 말한 바로는 '사비니 여인들은 곧 로마의 남자들과 사이가 좋아졌으며 로물루스 자신도 사비니 여인 헤르실리아(Hersilia)와 결혼했다. 이후 사비니와 로마는 화해하고 로물루스가 사비니의 왕까지 겸하게 된다.'라고 한다.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이라는 유화 작품에서 로물루스는 붉은색 옷을 입고 거대한 건물 위에 서 있다. 그의 모습은 화면 아래 복잡한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화면 왼쪽 푸른색 옷을 입은 여인이 자신을 안고 가는 로마 병사에게 저항하고 있다. 로마 병사 발밑에는 잡혀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 로마 역사에 따르면 사비니 여인 중에 유부녀가 한 명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로물루스와 결혼한 헤르실리아다. 이 작품에서 울는 아이를 그려 넣음으로써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이 헤르실리아라는 것을 알려준다.
어린아이 옆 노파가 잡혀가는 헤르실리아를 슬픈 듯 바라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 한 아버지가 딸을 끌고 가는 젊은 로마 병사에게 달려들고 있고 딸은 아버지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다. 로마 병사는 자신의 행동을 제지하는 노인을 제거하기 위해 단도를 들고 있다.
이 장면과 대조적으로 화면 가운데 갑옷에 푸른 옷을 입고 있는 로마 병사와 그 옆에 사비니 여인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이 장면은 사비니 여인들과 로마 병사들 간의 화해를 암시한다. 니콜라 푸생은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의 주문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인물의 몸짓이나 자세, 표정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절절한 역사에 담긴 얘기가 조각과 유화에 담겨 내려오는 것이다. 잠시 조각 앞에 서서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1597~1665)이 그린 그림이 생각났다.
[위 그림설명 : 사비니 여인의 납치,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1634-35, 니콜라스 푸생 작]
사비니 인들은 마냥 자신들의 여인들을 빼앗기고 가만있지 않았다.
자크 루이스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는 이후의 역사를 한 편의 유화로 남겼다. 먼저 그 역사를 되짚어 보자.
"사비니 인들은 와신상담하여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를 했었다.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드디어 사비니 인들은 로마를 향해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사비니 여인들이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양쪽의 싸움을 말리고 있지 않은가?"
이미 로마인들과의 사이에서 자식까지 낳은 사비니 여인들은 어느 편도 다치기를 원치 않아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인들은 자식들을 둘러업은 채, 로마군과 사비니 군이 대치하는 전쟁터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 제발 화해하라고 눈물로 호소했다고 한다. 결국, 마음이 움직인 양쪽의 남자들은 화해하고 동맹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사비니 여인들이 전투를 중단시키는 극적인 장면을 나타내고 있는데, 가운데에서 양팔을 벌린 여인은 로물루스의 아내가 된 사비니 여인 헤르실리아 Hersilia 고, 그림 왼쪽에 턱수염 난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이며, 오른쪽에 창을 든 남자가 로물루스라고 한다. 화가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혼란 상황에서 혁명 세력들 간의 화해와 안정을 바라는 마음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아무튼 사비니 여인의 중재는 로마의 역사이지만, 프랑스 화가가 그리고 루브르에 소장되었다는 점이 또한 뭔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네 역사는 어떻게 그려져야 했을까? 어떤 느낌이신지?
이렇게 피렌체 여행은 로마의 건국부터 르네상스를 지나서 하나하나 무심코 지날 수 없게 발뒤꿈치를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