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박 8일 서유럽여행 (08/25)
씨 노리아 광장에서 바로 5분 만에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에 당도했다.
"가능 한한 장엄하게, 더욱더 화려하게" 지어진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Duomo=Dome)의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우리 말로 해석하면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아르노 강 건너편으로 보이던 붉은색 두오모가 바로 이곳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다.
왜 두오모라고 부를까? 이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의 커다란 돔(Dome)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성당이 없었기 때문일까? 이 성당에는 한번에 약 3만 명이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처음 공사가 시작된 때는 1296년(단기 3629년, 고려 충렬왕 22년) 마무리 된 때는 1461년(조선 세조 7년). 무려 166년이 걸려서 완성된 곳이다. 우리네 관광객이 이러한 건축물에 대해서만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록문화이다.
성당을 설계한 이는 아놀포 디 깜비오(Arnolfo di Cambio), 106m의 두오모를 설계한 이는 필립보 브루넬레스키(Fillipo Brunelleschi)라는 것이다. 464개의 계단을 따라 꾸뽈라(Cupola, 둥근 지붕탑)에 오르면 피렌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편이 성당을 설계한 캄피오, 오른편이 지붕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 그가 지붕을 설계한 것이 확실하다. 시선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과거 누구의 예술보다 완전한 것'이라고 칭송받았던 '지오또의 종탑'
지오또 선생님과 제자 피사노가 마무리했다는 이 지오또의 종탑 (Campanile di Giotto)은 두오모의 남쪽에 우뚝 서 있다. 그냥 서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을 향해 84m나 올라가 있었다. 이 종탑은 단테의 '신곡(神曲)'에도 나오는 명소이다. 이 종탑은 흰색, 분홍색, 그리고 짙은 고동색의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그 자태가 고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엘리베이터 없이 414계단을 오르내린다는 체력적인 부담으로 등정 포기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싼 조반니 세례당 (San Giovanni Battista Firenze)이다. 1401년 피렌체의 산 조바니 대성당 세례당의 ‘천국의 문’은 나사 직물상 조합이 콩쿠르를 거쳐 뽑힌 기베르티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조각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신인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12.1)가 역시 젊고 재능 있는 경쟁자 부르넬리스키를 제치고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청동이 적게 드는 기베르티의 디자인에 높은 점수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테가 세례를 받았다는 싼 조반니 세례당 앞에 서니,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칭송했다는 세례당 문이 새삼 경외감으로 다가왔다. 10개의 황금 부조작품으로 구성된 '천국의 문'에는 성서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에서 솔로몬과 시바 여왕에 이르기까지 구약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황금빛 화려함이 극에 달하고, 미술적 원근감 표현이 수려하며, 예술적 가치가 출중한 이 천국의 문을 만드는데 28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우리 남대문은 몇 년 만에 복원한다고?
성당 주변의 관광객조차 서로에게는 사진 촬영의 대상이 되었다.
성당 주변에는 수 많은 관광객으로 가득했고, 광장을 지나치는 마차부터 어린아이들을 유혹하는 와플 그리고 태양의 나라답게 맛에 극치를 보이는 '아이스크림'은 피렌체의 정취를 더욱 선명하게 기억 가운데로 자리 잡게 해 주는 문화적 코드로 다가왔다.
아홉이라는 숫자와 단테 그리고 베아뜨리체, 그리고 단테의 생가
뒤이어 단테의 생가(Casa id Dante)를 향했다. 단테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인간의 교만과 방종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특히 교회의 세속화와 황금만능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래서 대성당을 지척에 두고도 골목에 있는 작은 교회에 다녔다고 한다. 지금 이 교회의 이름은 단테의 교회(Chiesa Di Dante)로 이름 지어져 통용되고 있다. 단테가 다닐 때는 분명히 단테의 교회가 아니었을진대.
단테 생가를 향하는 골목에 좌측으로 그 작은 단테 교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설명 : 단테의 교회이다. 골목만 나서면 아주 거대한 성당들이 있었지만, 단테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까?]
그리고 골목을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견고한 석조건물. 그저 안내인이 알려 주어서 알게 된 정도이지만, 이곳은 연인 베아뜨리체를 평생 잊지 못하고 밤마다 시를 쓰면서 슬픔을 달래던 단테의 생가(Casa id Dante) 앞에 도달했다.
단테의 간절한 바람에도 부유한 집안 딸이었던 베아뜨리체는 아버지의 강요로 돈 많은 상인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그리고는 스물네 살에 꽃다운 생을 마감했다. 돈만 밝히는 상인들을 탐탁잖게 여기던 그가 사랑하는 베아뜨리체를 돈만 아는 수전노에게 빼앗겼으니 얼마나 비통했겠는가? 그 아픔들을 속으로 삭이고 토하듯이 뿜어낸 것이 바로 '신곡'이다.
단테가 베아뜨리체를 처음 만난 것이 아홉 살 때였다고 한다.
유화로 남은 베끼오 다리에서의 만남을 그린 그림은 너무 성숙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몇 번이고 역사적 사실을 확인했다. 단테는 아홉 살 때 베아뜨리체를 만났었다. 다시 만난 게 9년 뒤였으며, '신곡'은 아흔아홉 개의 칸토와 서곡 하나로 이뤄져 있다. 단테는 작품 속에서 그녀를 아홉 번째 달 아홉 번째 날에 죽은 것으로 묘사했다.
단테에게 있어서 9라는 숫자는 끝과 시작이었으리라.
7백 년이 지난 지금, 키 작은 이방인인 나의 심장까지 뜨겁게 달구는 힘. 가장 크고 완벽한 숫자인 9로 사랑의 아픔을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단테. 피렌체 시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 강물처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채 피렌체를 아직도 빨갛게 달구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피렌체에 머무를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나의 7박 8일 유럽여행은 사흘을 마감하고 나흘째로 접어든다. 느린 걸음의 유럽 여행은 다음 행선지인 카사노바의 도시 베네치아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