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박 8일 서유럽여행 (16/25)
30 SEP2008
이탈리아 밀라노를 떠나서 스위스 인터라켄까지 5시간 만에 도착했다.
다섯 시간 대책 없이 눌러 지친 엉덩이를 위로하기 위해 서둘러 내린 인터라켄은 아주 소박하고 반듯하고 조금은 냉정한 도시 느낌을 보여주었다. 스위스의 작은 도시 '인터라켄(Interlaken)'은 '호수의 사이'라는 의미로, 말 그대로 베른 주의 툰 호수(Thunersee)와 브린쯔 호수(Brienzersee) 사이에 위치한다. 서기 1128년(우리나라 고려 인종 6년)에 생겨난 인구 5천 명의 소도시이다. 라틴어 '인터 라쿠스(Inter Lacus)'에서 유래하였고, 베른(Bern) 건너편에 있는 중심도시이기도 하다. 여행서에는 베른에서 배를 타고도 인터라켄에 올 수 있다고 한다.
식사를 위해 주어진 한 시간의 여유는 여행객 대부분을 면세점으로 이끌었지만, 난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여행 열기를 실감할 수 있는 곳. 이 작은 스위스 도시에 한국인만을 위한 면세점이 있다니! 길밖에 나오니 코 끝을 찡하게 찬바람이 불어왔다. 건너편에 작은 아파트 벽에는 등산을 위한 암벽연습장이 특징적으로 눈에 들어왔고, 한산한 길거리는 원색을 적절히 가미한 강렬한 장식들이 가지런히 상가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H 자동차의 SUV도 버젓이 스위스 번호판을 달고 지나쳤다. 그 자동차의 운전자는 흰머리의 멋진 시니어.
[인터라켄의 길거리 풍경 그리고 H 자동차를 몰고 가는 시니어 운전자]
스위스에서 의외의 코리아 애호가를 만났다. 인터라켄 한 식당 주인이 그랬다.
식당에 들어서면서 탄성이 곳곳에서 불꽃놀이처럼 터져 올랐다. 식당 메뉴에서부터 시작해서 행글라이더 안내까지 보너스로 라면을 준다는 내용까지 모두 한글이 빠지지 않았다. 물론 주인은 스위스인. 그들은 지난 2002 월드컵 이후 한국에 매료되었다고 하면서,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외치는 현지인 종업원. 식사의 맛은 고등학교 앞에 줄져진 분식집의 수준을 넘지는 못했지만, 사과 한 알의 이탈리아 도시락에 실망한 위를 달래기에 충분할 만큼 '보너스'를 연발하며 만족할 때까지 음식이 제공되었다.
[사진설명 : 왼쪽 위의 어른 머리만 한 쇳덩어리는 소의 목에 달았던 방울]
누군가 본인의 외국어 수준은 여행을 할만하다고 했다면 최악에 가깝다.
외국어 수준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얘기한다면, 돈 쓰는 외국어와 돈 버는 외국어 수준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돈 버는 외국어 수준은 그야말로 최고의 수준이다. 외국어를 사용해서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 얼마만큼 잘해야 하는지 예측 가능하다. 그런데 돈 쓰는 외국어는 언어를 하기보다는 돈을 지불하는 것뿐이다. 외국인이 우리의 외국어를 외국어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돈으로 외국어를 이해해 줄 뿐이다. 반증하는 방법. 누가 여행 가서 외국어를 몰라서 물건 못 사가지고 온 사람 보았는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돈 쓰는 외국어를 자랑하는 것은 못난 소치라고 치부될 수 있다. 피렌체에 이어서 한국 여행객의 예의 없는 처사를 목격한 곳도 여기이다. 그저 다녀갔다고 한글을 어디곤 남발하는 것이다.
[사진설명 : 제발 한글로 낙서 좀 하지 말았으면, 1천 원짜리가 식당 벽에 그득했다.]
아무튼 시선은 인터라켄을 남쪽을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는 '알프스 정상'으로 쏠리었다.
젊음은 언제나 밝고 희망적인가? 인터라켄에서 지나친 현지 젊은이들은 참으로 활달했다. 식사를 마치고 인터라켄 동역 (東驛. Interlaken Ost)에 집결하였다. 걸어서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열차를 타고 융프라우 정상까지 오른다고 한다. 난 표지판을 통해 소개된 융프라우(Jungfrau)를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고,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철도가 엮여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라켄 동역 앞에도 ASIA라는 동양식당이 있었는데, 특별히 한국 식사 메뉴가 올라와 있었다. 인터라켄도 한국 여행객의 주요 거점임이 확인되는 국면이다.
인터라켄에서 그깟 '유럽의 꼭대기'를 기차를 타고 거저 오르는 것에 대해 긴장도를 높이는 이유 두 가지 중 하나는 날씨. 과연 융프라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기상상태 그리고 또 하나는 산소가 희박한 산 정상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건강상태가 문제이다. 지난 여행객 중에는 예상치 못한 고초를 당한 분들이 있다는 설명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치는 시선은 긴장 그 자체였다.
기상이야 하늘에 맡기고 따른다지만, 2,800m 이상의 산에 오를 때 산소의 공급이 희박한 것이 원인이 되어 고산증에 시달리고 심지어는 사망할 수도 있다는 경고는 누구라도 무심코 지날 수 없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인터라켄 역 주변, 현지 학생들이 드문 보였다. 역시 조용하다.]
어김없이 오후 1시 정각, 그린델발트를 향해 열차는 출발했다.
그린델발트 (Grindelwald)는 해발 1,034m에 있는 이른바 알프스 고봉을 향한 베이스 캠스이다. 해발 1,034m의 고원에 있으며, 두 곳의 빙하가 근방에 있어 빙하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이거봉, 슈레크호른, 베터호른과 같은 고봉을 등반하기 위한 거점으로 유명한 마을인데, 봄부터 가을까지는 산기슭의 목초지에 야생화가 만발하여 도보여행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고, 겨울철엔 세계의 스키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린델발트까지는 자동차로도 여행할 수 있는 마을이다. 인터라켄의 해발고도가 567m이니 그저 500m만 오르면 된다. 인터라켄을 출발한 지 채 10분이 지나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들이 눈부시게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뒤 1시 40분. 그린델발트에 도착했다. 이곳은 설원으로 매혹적인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인터라켄 동역부터 그린델발트 역까지의 풍광]
그린델발트(Grindewalt)에서 클라이네 샤이데크(KleineScheidegg)행 열차로 갈아탔다.
클라이네 샤이테크는 해발 2,061m의 산악마을로 융프라우요흐로 향해 가는 열차가 떠나는 곳이다. 융프라우, 아이거, 묀히와 같은 알프스의 고봉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와 레스토랑이 있으며, 역 인근에 해발 2,472m의 라우버호른(Lauberhorn) 정상으로 가는 리프트가 있다. 융프라우요흐까지는 약 12Km로, 아이거반트와 아이스메어역은 암반에 뚫은 터널을 지나 도착하게 된다. 넓은 초원지대의 도보여행 코스가 잘 다듬어져 있어 역과 역 사이의 전원 마을을 감상하며 도보 여행하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고지로 문제없이 올라가는 열차의 비밀은 선로에 있었다. 톱니바퀴로 바퀴와 레일이 결합하여 단 한 번의 운행사고 없이 눈 내리고 얼음 어는 철길에 현지 주민과 여행객 그리고 관광객을 안전하게 옮겨주고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풍광은 아름답지만, 점차 춥고 눈 많고 높아짐을 실감케 해주고 있었다. 오후 2시 20분, 인터라켄을 출발한 지 1시간 20분 만에 클라이네 샤이데크에 도착했다. 이곳은 눈을 즐기려는 사람으로 인터라켄의 한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발길 옮기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린델 발트 역부터 클라이네 샤이데크 역까지의 주변 풍광]
융플라우로 가는 철길을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1. 인터라켄 동역 (Interlaken Ost. 567m)를 출발해서 2. 그린델 발트(Grindewalt. 1,034m) --> 3. 클라이네 샤이데크 (Kleine Scheidegg. 2,061m) --> 4. 아이거 역 (Eigergletscher. 2,320m) --> 5. 전망대 아이거반트 역(Eigerwand. 2,865m) --> 6. 아이스미어 역 (Eismeer. 얼음바다. The Sea of Ice. 3,160m) --> 7. 융플라우요흐 (Jungfraujoch. 3,454m)까지 오른다.
'자연은 인간에게 겸손함을 아무런 가식 없이 보이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그래서 여행객은 상념만 떨쳐버리면 머릿속에 반듯하게 줄 그어진 두꺼운 공책과 끊이지 않게 잉크가 나오는 펜으로 자연 그대로의 겸손함을 담게 해 준다.' 자연을 만끽하던 스위스 알프스의 자락 한 역 귀퉁이에 한글로 쓰인 여행객의 쪽지에 남겨진 글이다.
난 이 대목에서 멋진 글귀가 생각나질 않는다. 설국의 눈 모양 머릿속이 그냥 하얗게 바랜 것 같다.
오늘은 1. 인터라켄에서 3. 클라이네 샤이데크까지. 융프라우요호로의 여행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