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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지" 한 마디로 망자와 이별하는 일본인

죽음에 극단적으로 냉정해 울지도 않는 일본인

소방서 길건너에서 오랜 기간 출장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저녁 7시가 되면 요란하게 종을 치면서 골목골목을 다니며 "불조심하세요 (火気をつけてください。 ひにきをつけてください。)"라는 소방차의 방송도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퇴근길 장 보러 마트에 들르거나 직원들과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실량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지만 유독 밤이 일찍 오는 지리적 특성상 새로운 장소를 찾는 반경은 당연 내 경험인 발보다는 타인의 경험인 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로 막연히 찾아 나서 확인하기보다는 직원들의 추천 얘기를 듣고 가본 후 확인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숙소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례식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걸어서 지나치던 곳인데, 숙소 건너편 건물로 가려져서 안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직원의 얘기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5층짜리 주거용 멘션의 건너편에 자리 잡은 장례식장은 이름도 고상한 식당의 이름으로 착각할 정도로 구분되지 않았고, 여러 차례 지나면서도 이곳이 그곳임을 알고 있는 직원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이 장례식장은 NIMBY(Not In My Back Yard) 저항도 없이 생활공간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동네 가장 큰 마트에서 30m도 떨어지지 않았고, 수많은 차량이 오가는 곳에 있지만 주거의 방해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인정하는 것이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한국인들은 그곳이 장례식장인 줄 몰랐을까요? 


한마디로 답을 하자면 '곡(哭)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은 소리 내어 울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똑같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반복되는 순환을 겪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유난스럽게 울음소리를 밖으로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소리를 밖으로 내지 않는 사람들이 일본인인 것 같습니다. 전혀 울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놀다가 다쳐서 우는 소리는 자연적이지만, 인위적으로 소리 내어 울지 않도록 훈련되면 현저히 작아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일본인에게 가까운 역사 중 참으로 아프고 힘든 시기가 최근 사건으로 지난 2011년에 있었습니다. '동일본대지진'입니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인류 역사적 최악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고 밝히면서 피해액 규모를 한화로 약 282조 원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재해가 발생된 지 7년이 지난 2018년이 되어서야 사망자 공식 발표가 있었습니다. 도도부현에서만 15,897명이 세상을 떠났고, 2,534명이 실종되었다고 말입니다. 지진 및 그 이후 닥친 쓰나미, 여진 등으로 도호쿠 지방과 간토 지방 사이 동일본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여기서 피해 규모 등 물질적인 내용보다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본인의 반응에 더 놀랐습니다.


"쇼가나이 (어쩔 수 없지, 仕様がない:しようがない)"


'쇼가나이 (어쩔 수 없지, 仕様がない:しようがない)'는 '사양(仕様:しょう)이 없다.' 다시 말하면 '수단 또는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죽음 앞에서 생명을 되돌릴 수단이나 방법이 없다는 얘기로 중얼거리면 바로 일어서 아픔을 잊은 듯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본인입니다. TV에서 재난 상황 이후 장례식이 미루어지거나 울부짖는 장면을 볼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쇼가나이' 공감대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하늘조차 원망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일본인의 정서입니다.


일본인이 인정머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연) 재난왕국'이기 때문에 너무나 잦은 또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재해를 반복적으로 오랫동안 경험해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재해가 우리 앞에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매뉴얼에 따라 대비하고 비상구호 활동에 전념할 뿐 죽은 생명은 어찌 돌이킬 수 없다는 체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일본에서는 '호상(好喪)"이라는 단어도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호상이건 악상이건 모두 '쇼가나이'일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직장인들에게는 누군가에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본인의 도리이고 책무인 것처럼 도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면 일본인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요? 다시 회사에서 일본인들과 일을 같이하는 일상으로 돌아와서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만나면 일부의 일본인들은 '잇쇼켄메(一生懸命 いっしょうけんめい)'하는 말을 듣습니다. 목숨 걸고 해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 일은 해결되고 처리될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쇼가나이'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돌이키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을 하면서 '쇼가나이'하면 "불가능해"라는 뜻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출장 간 기간 동안 함께 일해야 하는 한 직원으로부터 낮은 혼잣말로 "쇼가나이"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순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기 없는 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대한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까 해서 현지에서 근무하는 일본어 전문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답변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가끔은 이 말이 쓰이는 시추에이션에는 간곡한 부탁에 대해서 쇼가나이. '일단 한번 해봅시다'라는 것에 쓰이기도 합니다. 조금 체념과는 다른 것이죠. 그건 상대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맞는데, 일단 한번 해주겠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상대의 마음을 바꾸게 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해 주는 정서라고 봅니다. '정적이다. 순응하는 민족이다'라고 하는 부분이 밑바탕에 깔린 동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나오는 시추에이션은, '김 상이니까, 김상이 그렇게 곤란해하니까' 라는 말이 자주 따라붙습니다. 그건 신뢰 혹은 감정적인 동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인이 감정적으로 동적이고, 정(情)이 많아 관계 형성 초기에 가끔, '쇼가나이'라며 아주 그들의 잣대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친절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뢰를 얻으면, 사실 '쇼가나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일본인의 장점입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듣고 직감했던 것과 다름없이 딱 그 직원을 통해서 해야 일은 마무리하지 못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고 돌아왔습니다. 물론 일본인 모두가 도요타자동차 직원처럼 철저하지 않습니다.


'쇼가나이'를 영어로 해석한 글이 있어 본다면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We have no choice. It's out of our control. It can't be helped. There's nothing you can do. I'm afraid you don't have an option. It couldn't be helped. There is nothing more we can do. Rome wasn't built in a day. It's out of my hands.


울지도 않고 '쇼가나이' 한 마디로 망자를 떠나보내는 일본인과 함께 어울려 사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은 멀고도 험하고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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