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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절대로 숨기고 싶은 '풍습'

이 풍습은 '솎아내기'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정말로?"라는 의구심이 들만한 일본 풍습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에도(江戶) 시대에는 마비키(間引, まびき)라는 '(일본인이 숨기고 싶어) 절대로 말하고 싶지 않은 '영아 살해 풍습'이 성행했습니다.


에도 말기에는 자녀수가 3명을 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그래서 평균 자녀수가 3명을 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상 태어나는 아이는 부모가 전부 죽여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비키를 금지하는 방이 붙기도 하였습니다.


에도 말기의 농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는 '데와(出羽, 현재의 야마가타와 아키타)와 오슈(奥州, 현재의 아오모리,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에서 매년 1만 6, 7천 명, 가즈사(上総, 현재의 치바현)에서는 갓난아기 3, 4만 명이 매년 솎아냄(마비키) 되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당시 일본을 방문했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 1532년 ~ 1597년 7월 8일. 포르투갈의 로마 가톨릭 예수회 사제로 선교사)'는 그의 책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 '일본의 여성은 기를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두 아기 목을 다리로 눌러 죽여버린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마비키의 전통이 얼마나 강했는지, 20세기 들어서까지도 일본 정부는 이를 근절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마비키가 성행한 이유는 과도한 징세로 가난한 일본 백성들에게 있어 일용할 양식을 축내는 '새 식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랍니다. 실제로 에도 시대 당시 과도한 징세로 인해 민란이 빈번했던 만큼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가는 이유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공감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라는 뿌리 깊은 생각


'효(孝)'를 중시하는 유교의 영향이 강했던 일본에서는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불교와 신도(神道)는 출산에 관련되는 것을 금기시하고 태아와 신생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단지 아기가 태어나 무사히 한 달을 넘기면 '하츠미야마이리'(初宮参, はつみやまいり, 초궁참, 첫 번째 신사참배)'라고 해서 '우브스나카미(産土神)'께 감사하고 보고하는 행사를 합니다. 


남자아이 32 일째, 여자아이는 33 일째에 보모 또는 친척 여성이 안고 그 위에 '미야마이리(宮参, みやまいり, 신사참배)'라는 이름의 나들이 옷을 씌워 미래를 축복하는 의미로 신사(神寺)에 가서 '우부스나카미(産土神, うぶすながみ, 그 사람이 태어난 고장을 수호하는 신, 산토신)'에 참배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또한 아기는 '하츠미야마이리(初宮参, はつみやまいり)'라는 통과 의례를 마침으로서 출산이 종료되고 인간 사회의 일원이 된다는 일본인의 일반적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위해를 가하더라도 '인간'이 아니었기에, 죄라는 의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때마다 편리하게 생각하도록 절차를 만드는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일본의 '하츠미야마이리'는 이제부터는 죽이면 안 된다는 의미 밖에는 그 뜻이 없어 보입니다. 아기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면역력도 갖추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을 축하하는 잔치'인 우리네 '100일 잔치' 풍습과는 그 근본이나 결이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솎아내기(마비키, 間引, まびき)'의 방법도 다양 


일본의 영아 살해 풍습은 농업사회의 영향을 받아 '간벌(間伐)'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농업에서 '솎아내기'란 식물의 밀도를 줄여 나머지가 더 잘 자라게 줄이는 과정입니다. 나무가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한 숲의 벌채 또한 솎아내기에 속하는데 줄여서 쓰기를 간벌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전형적인 '마비키'는 엄마가 무릎으로 목 졸라 죽이는 방법이고 또 다른 방법은 젖은 종이로 아기의 입과 코를 질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들이 가장 흔하게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주로 희생되는 아이는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아들


주요 희생되는 아이는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딸들은 결혼을 해서 출가하거나, 종업원이나 매춘 여성으로 팔렸거나, 게이샤가 되기 위해 떠날 수 있기 때문에 보통 '마비키'에서 구제되었다고 합니다. 또 달리 특이한 것은 쌍둥이의 희생입니다. 쌍둥이를 낳는 것은 야만적이고 불행한 것으로 인식되어 그중 한 아이 또는 쌍둥이 모두를 솎아냈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범죄는 일반 살인죄보다 가볍게 취급. 


1908년 제정된 일본의 메이지(明治) 형법은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범죄는 '존속 살인'으로 특례가 적용되어 일반 살인죄보다 매우 무거운 사형 또는 무기 징역이 부과되었지만,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범죄는 '상해 치사 혐의'가 적용되어 일반 살인죄보다 오히려 가벼운 죄로 취급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이의 행동과 법률 행위를 어쩔 수 없이 제한할 수 있는 '친권'과 징계권을 이용하여 심한 체벌을 죽음으로 몰아가도 체벌 시에 살의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지나친 징계권 행사'로 살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간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육을 심하게 했을 뿐 죽일 의도가 없다는 것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995년 일본의 형법 개정 이후에는 부모든 아이든 일반 살인죄와 같이 규정됐지만 실제 운용에서는 영아 살해의 양형이 여전히 가벼운 판례가 많습니다. 또한 아이에 대한 '비속(卑屬)'이라는 명칭도 철폐되고 있지 않습니다.


위생 부분의 우위로 영유아 초기 사망률은 낮았음


에도 시대 초기에는 전란이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오면서 인구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지만, 에도 시대 중기 이후로는 일본 내에서 큰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일본의 인구 성장률은 계속 정체되어 왔습니다. 무사 등 특수 계급을 제외한 전국의 인구는, 막부가 조사를 시작한 1721년에 2,600만 명, 가장 적을 때에 2,489만 명(1792년), 가장 많을 때에 2,720만 명(1828년)으로, 극히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온천을 개발하기 쉬운 환경의 영향으로 목욕문화가 발달했고, 에도 시대 즈음이 되면 주요 도시지역에서 대중목욕탕이 보편화되었을 정도로 목욕을 자주하여 영·유아의 초기사망률을 극도로 낮출 수 있는 위생 부분에 다른 나라에 비해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인지 평균수명이 동 시기 다른 국가들보다 유의미한 수준으로 높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 시기에 '마비키(영아살해풍습)'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무리 조세 압박 등의 영향이 있다고 해도 일본의 출산율이 평균적으로 5~6명대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전란기가 아닌 평화시라면 기근 등의 사태가 아닌 이상 인구는 매년 늘어나야만 했고, 그러면 최소한 동 시기 청나라와 조선, 베트남보다는 인구증가율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에도 시대 때의 인구증가 억제책은 '마비키(솎아내기)"


이 당시에 피임기술이 변변치 않았던 만큼, 에도 시대 때의 인구증가를 억제하는 방법은 대부분이 '마비키(솎아냄)'에 의한 영아 살해가 분명했습니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 영주의 금지령이나 교사에도 불구하고, 기근시 농촌 등에서, 영·유아를 압살, 교살, 익사, 생매장 등의 방식으로 영아 살해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에 7세 이하의 아이는 '신(神)의 아이'로 여겨 언제라도 신에게 죽여서 답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일종의 '쿨링 오프(Cooling Off)였습니다. 그래서 '마비키'를 '아이 반환(反換)'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의료 및 위생환경이 좋지 않아서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당시에는 '일곱 살까지는 신의 손에'라는 말이 전해집니다. 아이를 정식 인간으로 취급하게 되는 때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끔찍한 풍습이 당시 일본에서 성행하였던 것일까요? 일본인들의 변명은 아주 간단합니다. 


당시 일본이 동북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서 세율이 가장 높은 50% 수준


일본 백성들이 대부분 새로운 생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에도 시대의 쌀 생산량을 보면 1700년의 농지 면적은 282만 헥타르였습니다. 60%가 논이라고 한다면 논의 면적은 169만 2천 헥타르, 인구는 28,287,200명, 인구 1인당 경지면적은 0.598반(反=약 300평), 에도 시대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 190 kg/반을 고려하면 1인당 0.758석, 세금 50%를 공제하면 1인당 0.379석. 1인당 0.38석으로 1석 기준 144 kg로 보았을 때 1인당 144 kg×0.38석=54.72 kg이 나옵니다. 먹을 만큼의 소출이 아니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솎아낸다는 논리로 연결하는 것은 끔찍한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육류 보급이 확대되고 쌀을 제외한 밀과 감자·옥수수 등의 기타 양식으로 인해 쌀을 적게 먹게 된 현대 한국인도 1인당 연간 60 kg 이상을 소비하는데, 육식 금지령(678년~1872년까지 약 1200년)까지 걸린 에도 시대의 일반 백성들은 이렇게 극도로 식량이 제한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추정의 60%가 논, 그 외의 40%가 고구마나 감자 등을 재배하는 밭을 지닌 농부들도 있었겠지만, 세금의 기준이 쌀인 만큼 농민에 대한 조세부담은 공평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한국에는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사자성어로 고통을 분답합니다. 그렇지만 일본 에도 시대의 일반 백성들은 십시일반을 하면 모두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정에 새 생명이 태어나면 경사스러운 일인데, 일본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전 가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비키'는 그런 암울한 빈곤 속에서 만들어진 전 가족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던 것이라고 일본인들은 애써 설명합니다. 일본에 유독 '귀신'의 종류와 양이 많은 것은 이 '마키비'가 일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에도 시대 때 해매다 7, 8만 명이 '마비키'로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


에도 시대 때 얼마만큼의 아이들이 '마비키'로 목숨을 잃었을까요? 관련 자료들마다 차이는 일부 있지만, 에도 시대 당대의 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의 저서 《草木六部耕種法(초목육부경종법)》이나 《경제 요록》에 의하면, 가즈사국(上総国)에는 약 10만의 농가가 있었지만, 거기서 살해당하는 아이의 수는 해마다 3~4만 명에 달했으며, 또 무츠국, 데와국에서는 '마비키' 하는 수가 해마다 7, 8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마땅한 인구 조절의 수단이 별로 없었던 당시로서는 '마비키'는 필요악이었다고 변명합니다. 즉, 그 당시에는 '솎아냄(마비키)'을 별로 '잘못된 행동'이나 '영아 살해' 같은 흉악한 범죄가 아니라 그저 아이를 신에게 다시 돌려주는 일에 불과하며, 자기 아이로 직접 기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마비키'로 계속 살해한 결과 에도 시대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인구조사를 한 교호(亨保) 11년(1726년)부터 그 이후 막부 붕괴, 메이지 유신 때까지 에도 시대의 인구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고, 대부분 2,700만 명 선에서 항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메이지(明治) 시대가 되면서 일본 정부는 방침을 바꾸어, 국가 발전을 위해서 더는 아이들을 일부러 죽이지 말고 최대한 낳아서 늘리도록 하였고, 이후 '마비키'는 당연히 영아 살해와 같은 흉악한 살인죄로 간주되었으며, 영아살해가 크게 줄면서 일본의 인구는 이후로 매년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법률로 금지되었다고 해도, 에도시대 근 260년 동안 굳어진 악습이 바로 사라질 수는 없었으므로, 지방에서의 '솎아냄(마비키)'은 남몰래 계속되었습니다. 아마도 '쇼가나이("어쩔 수 없어, 불가항력이야")'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본인의 기저 심성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에 의하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모든 집에 1남 1녀의 자녀만 있는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위적인 산아 조정을 하지 않는 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존재했음은, 마비키 풍습이 메이지 시대 당시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자지 않으면 강에 버린다"는 일본의 전통 자장가 구절


1930년대까지도 홋카이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마비키 풍습이 일부나마 계속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자장가에서 조차 마비키를 암시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자장, 자장, 잘 자거라, 자지 않으면 강에 버린다. 자장, 자장, 잘 자거라, 자지 않으면 묻어 버린다" 이 자장가 중에 '강에 버린다', '묻어 버린다'는 구절은 '마비키'를 지칭하는 은어라고 합니다.


'마비키(間引, まびき)'가 '이지매(苛, いじめ)'로 흘러간 것은 아닐까?


이렇게 뿌리 깊은 '마비키'가 완전히 사라졌을까요? 저는 솎아내기 풍습인 '마비키'가 남은 악습은 '이지매'로 흘러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지매(苛,いじめ)'를 일본어 사전에서 뜻을 찾아보면 '괴롭히다; 들볶다; 혹독하게 다루다; 최대한으로 혹사하다'로 나옵니다.


약한 친구를 그냥 두어서는 단체 기합을 받게 되거나, 본인의 밥그릇이 작아질 것을 우려해 '마비키'했던 일본의 악습이 친구나 동료에게 괴롭히고, 들볶고, 혹독하게 다루고, 최대한으로 혹사하는 방식으로 변형되었을 뿐이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우리가 일본을 제대하고 이해하고, 일본의 문화를 선별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마비키'처럼 차마 새어나갈까 일본인조차 숨기고 싶어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문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무작정 미워하지는 맙시다. 적어도 그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도 일본을 이겨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일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노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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