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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절(寺)이 교육기관이었죠

여자아이도 차별 없이 '읽고 쓰고 셈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에도시대(江え戶ど時じ代だい, 1603.3.24~1868.5.3)' 교육은 우리나라의 서당(書堂) 교육과는 어떻게 달리했을까요?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서당처럼 '에도시대(江戶時代)'때부터 합숙교육을 통해 교육이 진행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열심히 찾았지만 식자에게는 상식적인 수준으로 간단하게 적어봅니다.


17세기 일본에선 6살이 되면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의 자료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의 교육에 관련된 체계적인 교육은 에도시대인 약 17세기부터 '무사(武士, さむらい, 사무라이=侍)와 그의 가신 가족의 자녀들이 6~7세가 되면 '절(寺, てら, 테라)'에 보내어 기거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기숙학원이 이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절(寺てら; 테라)'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테라코(寺子, てらこ)'라고 불렀습니다. 얼마 정도 정착기를 거친 이후에는 '테라코'의 교육은 절을 벗어나 세간에서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테라코'라는 말은 그대로 남아, '테라코야 (寺子屋, てらこや)'는 말이 일반적으로 '자제를 교육하는 시설'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도시는 물론 전국 농어촌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1만 5,000여 개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들의 실용적인 교육을 통해서 상인계급의 증가에 공헌하게 된 것으로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대도시인 '에도(江戸, えど, 도쿄의 옛 지명)와 '오사카(大阪, おおさか)'를 비롯해서 농촌 및 해안지역에 널리 성행하였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19세기 초 공립학교 학제가 시작되는 전까지 같은 나이의 아이들 중에 약 70%가 '테라코(寺子, てらこ)'로 참여하는 등 대중화되었습니다.


일본에선 '절(寺, 테라)'이 한국의 서당과 같은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테라코야 (寺子屋, てらこや)'는 1872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정부 주도의 공립학교가 설립되면서, 전체 국민에 대한 기초 교육을 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테라코야 교육은 실용적이었고 수요자 중심이었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오히려 현대에 와서 획일화된 기초교육이 비판받으면서 그 당시의 장점이 새롭게 부각될 정도입니다.


'테라코야'의 교육 방침은 ‘요미가 키소로 방(読書算盤, よみかきそろばん)’의 교습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쓰고 '주판(=셈, 算盤,  そろばん)'을 할 줄 알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방법론으로 채택된 것이 ‘데나라이(手習, てならい)’입니다. ‘시쇼(師匠, ししょう)’라 불리는 교사가 직접 손으로 쓰고 읽어주면 학생들은 종이, 붓, 벼루, 먹을 필수품으로 지참하여 교사의 지시에 따라 익숙해질 때까지 글을 쓰고 읽기를 반복하였습니다. 학년제, 표준 교과과정이 없기에 모든 학생은 한 교실에 앉아 수업을 받았습니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고 총명한 학생들은 진도를 빨리하여 또래보다 더 수준 높은 내용을 교습받을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충분한 여유를 두고 습득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에도시대의 교과서

당시 교과서로 주로 사용된 것은 ‘오라이모노(往来物, おうらいもの)’였습니다. '오라이모노'는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다방면의 주제에 대해 평이한 문체로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기술된 문집입니다. 거의 모든 방면의 '오라이모노'가 존재하여 교사들은 각 지역의 특성과 교육 수요 등에 맞추어 교과목을 선정하여 교습하였습니다.


또한 일본 사회의 역사, 풍습, 제도 등 기초상식을 연중행사 소개 형식으로 폭넓게 다룬 ‘데이킨오라이(庭訓往來, ていきんおうらい)’가 기초 교과서 형태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직업 생활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지리, 상업, 기술, 산수 관련 과목이 다양하게 교습되었습니다.


한편 실용적 지식과 아울러 서민들 각자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배양해야 할 심성과 덕목이 주요 교육 목표로 강조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교과서 역할을 한 대표적인 것이 ‘지쓰고쿄(実語教, じつごきょう)’와 ‘도지쿄(童子教, どうじきょう)’라는 수신서(修身書)의 일종이었습니다.


'지쓰고쿄'는 조선시대의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처럼 거의 모든 '테라코야'에서 교본으로 채택되어 학생들에게 가르쳐졌다고 합니다. '지쓰고쿄'에는 유불도신(儒彿道神)을 망라한 일본적인 도덕관과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산은 높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많이 품고 있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부가 있어야 훌륭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있어야 비로소 훌륭한 것이다’

‘노인을 자신의 부모처럼 공경하고,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사랑하는 것이 인간 도리다’



이런 유형의 가르침의 내용인데, 이러한 관념과 전통은 현대 일본 사회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테라코야'는 일반인을 위한 특별 야간강좌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전래의 고급수학인 ‘와산(和算, わさん=주산)’, 고급 상업회계인 ‘부기(簿記, ぼき)’ 등의 강좌를 개최하는 경우도 있었고, 고급 유교경전에 대한 심도 있는 학습을 위해 당시 유행하던 ‘가이도쿠(会読, かいどく=독서토론회)’와 연계하여 고급 경전반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별도의 과목으로는 역사 그리고 지리학이 있었습니다. 여자에게는 바느질, 다도 의식, 꽃꽂이 기법과 예술품, 공예품 만들기를 가르쳤습니다. 수업은 일반적으로 사무라이의 개인 주택, 승려 평민이나 심지어 개인 사저에서도 진행되었습니다.


가르치는 강사는 주로 평민 있었지만, 무사와 불교의 승려들도 테라코야에서 가르쳤습니다. 당시 행정 처리는 교사들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여자 아이들도 차별 없이 '테라코'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교육학자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식 학제 개혁으로 소학교령이 내려졌을 때 전국적으로 취학 대상 아동들의 입학 수속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테라코야의 광범위한 보급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개항이 되고 문물을 받아들이고 모방하는 속도가 달랐던 것은, 일반 서민이 실용학문을 '에도시대' 때부터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 그중 하나의 요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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