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캠프 (Boot Camp) (3)

Be Nobody: Marlinspike의 악몽

by 이진규

모병관이 신병훈련소, 그러니까 붓캠프로 떠나는 내게 해준 조언이 있다.


“붓캠프에서는 ‘No body’가 되는 게 최고야.”


60명이 넘는 디비전 훈련병들을 세명의 교관이 관리하는데 이들이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너무 잘하지도 너무 못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했다. 눈에 띄지 않게 묻어가는 게 최선이라고.


두 눈을 바라보고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해주는 모병관의 말에 나는 왜 그래야 하는지 되묻지 못했다.



수영 시험이 끝나고 훈련소 내에 치과에서 사랑니 네 개를 몽땅 뽑고 하루 SIQ (Sick in quarters; 열외)를 하고 나자 본격적으로 훈련과정이 시작되었다.


우선 두툼한 책을 지급받는데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자투리 시간마다 공부를 해야 했다. 이는 하루일정 사이사이에 루즈해질 수 있는 조금의 시간도 훈련병에게 허락되지 않는 압박으로 작용되었다. 암기내용이 상당한데 조교들은 틈이 날 때마다 무작위로 한 명씩 지목해서 질문을 하는데 대답을 하지 못하면 당연히 기합을 받았다.


건물과 건물을 오가는 이동시간은 제식훈련의 시간이었고 아침 기상시간부터 밤 취침시간에 소등을 할 때까지 항상 조교가 훈련병들 곁에서 관리감독을 하기 때문에 조금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훈련은 수업과 실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수업을 담당하는 교관들은 비교적 부드럽게 대해줬다. 자신의 Sea Story (경험담)을 해줘서 긴장도 풀어주고 동기부여를 주었다. 반면 실습을 담당하는 교관들은 실습 내용이 안전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조금 엄한 편이었지만, 디비전을 담당하고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RDC (Recruit Division Commanders)에 비하면 천사들이었다. 모든 교관들은 틈이 날 때마다 “입대를 결심한 너희들이 자랑스럽다.”라고 말해주었다.


어느덧 한주가 지났다. 나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잘 적응하고 있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항상 남들보다 두 배 더 긴장해 있어야 했지만 나름 한국에서의 수직적 문화가 몸에 배어 있었고 고등학교 ‘교련’ 과목도 수료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잘 하진 못하더라도 혼자 지적을 당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간혹 지시사항을 못 알아듣는 경우도 있었지만 눈치껏 다른 아이들을 보고 따라 해서 몇몇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편 눈에 띄게 잘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고등학교 때 JROTC (Junior 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 프로그램을 수료한 아이들이었다. JROTC를 마치고 군대에 들어오면 붓캠프 이후 계급도 한 단계에서 두 단계 더 높게 시작하고 대학 ROTC지원에도 유리했다. 이들은 확실히 기초 지식도 있고 어느 정도 리더십과 자신감이 돋보였다. 하지만 RDC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만큼 이름도 자주 호명되고 거의 매 수업시간마다 질문을 받았으며 디비전에서 간부 역할을 부여받아서 많은 상황에서 대표로 기합을 받거나 실패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아야 했다. 붓캠프에서 ‘너무 잘하지 말라’는 모병관의 말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No body theory’는 내 모병관만 아는 조언이 아니었다. 화장실에서나 계단을 오를 때 등 교관이 감독하지 않는 시간에 허락되는 찰나의 잡담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의 훈련병들의 대화는 주로 자신들이 아는 팁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한 아이는 키득키득 웃으며 교관들이 자기 이름을 모른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나 역시도 교관이 부를 때 “You!”라고 부르는 훈련병 중 한 명이었다. Marlinespike 훈련 전까지는…


악몽의 시작은 보초 근무였다. 각 디비전의 60명이 넘는 인원은 돌아가면서 Ship(디비전의 생활관) 문 앞에서 보초를 섰는데 이는 실전에서의 당직근무를 경험하는 훈련의 일부였다. 출입자 관리, 각종 보고, Deck Log(근무일지) 작성까지 해야 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아이들의 글씨가 엉망이라 읽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RDC는 단체 기합을 준 후, 종이를 나눠주고 간단한 문장을 쓰고 이름을 적어서 내게 했다. 그리고 글씨가 이쁜 아이들을 추려서 이들만 보초를 더 서게 했는데 내가 하필 글씨가 이쁜 아이들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Marlinespike 훈련은 Seamanship 훈련 중 하나로 배가 입항하거나 출항할 때 밧줄을 다루는 훈련이다. 실전에서는 안전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만큼 중요한 훈련이었다. 교실 수업으로 시작됐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결국 코까지 골며 졸다 교관에게 따로 기합을 받았다. 기합을 받고 자리로 돌아가는데 교관이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Petty Officer (부사관님), Seaman Recruit Lee, Petty Officer.”


내 이름이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수업을 통으로 놓친 것이었다. 바로 실습이 시작되어 우리는 한 줄로 모형 배가 있는 실습장에 입장했다.. 나는 빠르게 뇌를 회전시켜서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래, 키도 중간이니까 여기서 앞에 애들 하는 거 보면서 배우자. 한국인 특유의 눈치라면 충분히…


“자, 두 그룹으로 나눌 건데. 아까 너, 이름이 뭐였지? 아, Lee! 너부터 네 뒤에 인원은 배에 오른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아까 배운 대로 line handling을 한다. 제일 앞에 있는 녀석이 knot(매듬새)를 맡는다. 이거 203 디비전 하고 경쟁이니까 잘해라. 203 디비전은 XX분 걸렸어. 그런데 안전 페널티를 두 개나 받았다. 페널티 하나에 5분씩 감점이니까 너희는 페널티만 안 받아도 이길 수 있다.”


머리가 하얘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RDC의 말이 끝나자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허벅지를 꼬집어 봤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이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한참을 어버버 하고 있자 뒤에 아이들이 소리쳤다.


“뭐 해, 빨리 매듭 풀기 시작해. 이쪽. 이쪽!”


어버버 하면서도 아이들의 말에 집중했다. 아, 밧줄을 이렇게 잡고 여기 기둥에서 풀면 되는 거구나. 한쪽을 잡고 한 기둥에서 풀어서 밧줄을 넘어가서 다른 기둥으로 향하는데…


-삑


“디비전 204, 페널티”


응? 아, 이쪽으로 오면 안 되는구나. 다시 넘어가야…


-삑


“디비전 204, 페널티”


뭐야…


-삑


“디비전 204, 페널티”


“X$#$, 야, 줄! 줄 넘어가지 마! 저리 비켜! 뒤로 가!”


JROTC 출신의 에이스 훈련병 아이가 욕설을 섞으며 내 자리를 빼앗았고 RDC를 바라보다 나를 노려보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204 디비전 종료. XX분 XX초. 페널티 세 개.”


페널티가 없었으면 우리 디비전이 4분 차로 이길 수 있었던 기록이었다. 교관이 다가와서 소리쳤다.


“와우, Lee! 인상적이었다. 혼자서 10초 만에 페널티 세 개라니 이런 건 처음이다. 줄넘기 잘 봤다. 그동안 잘 숨어있었구나! 이름도 쉬운데 왜 너를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해서 숨고 싶었지만 나 때문에 단체 기합을 받아서 다른 아이들 눈치가 보였다. 나는 잡담할 틈이 생기자마자 아이들에게 사과했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어이없어서인지 다들 웃기 바빴다. 그리고 웃프게도 “괜찮아” 하고 다가오는 아이들은 모두 고문관 수준으로 매번 지적을 받는 아이들이었다. 이름을 갖게 된 걸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나는 No body 클럽에서 방출되고 말았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