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간계 연구소 Dec 24. 2023

내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언제일까

나는 위로 누나가 둘이나 있는 바람에 산타 할아버지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얘기를 꽤 어릴 때부터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나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겠지. 12월 25일 내 머리맡에 놓아진 선물이 엄마 아빠가 준 선물이라니 너무 재미없고 현실적이잖아. 게다가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라고는 하지만 어린 나에게 크리스마스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다름 아닌 산타 할아버지가 아니신가.


그러나 그 믿음은 머지않아 깨졌다.


정확히는 나이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초등학교 3-4학년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설레는 마음으로 잠든 크리스마스이브, 너무 설레었는지 누군가 집에 들러오는 소리에 귀가 커졌다. '어 이거는 산타 할아버지가 들어오는 소리구나' 근데 들리는 목소리가 영 엄마 아빠다. 그리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나가는 소리다. 금방 돌아온 엄마 아빠는 들어오자마자 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머리맡에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레고 선물을 놓고 나갔다. 작은 마차 세트였는데 아직도 그 모양이 생생하다. 그다음 해부터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직접 주셨던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들을 회상하면 늘 그때 듣던 음악들이 떠오른다. 그러면 그 순간의 풍경과 그 당시의 내 모습이 그려지면서 마치 그 당시 느끼던 감정들이 다시 느껴지는 듯하다, 그러고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아련함이 밀려올 때도 있다.


나에게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마스의 풍경은 늘 90년대 한국의 12월이다. 90대는 한국 대중가요의 전성기 아니던가.


1993년 12월에는 미스터투(MR2)라는 남자 듀오의 '하얀 겨울'이라는 곡이 난리였다. 온 세상에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중학생이었던 나와, 크리스마스 불빛. 이 두 남자의 열창하는 모습과 목소리, 눈이 오는 영하의 날씨에도 뭔가 따뜻한 그 느낌의 크리스마스와 그 연말의 풍경이 생생하다.


1994년에는 그 유명한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나와버렸다. 내가 아는 한, 세상에 원래부터 있었을 것같이 오래된 캐롤들을 제외하면 중간에 나와서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캐롤의 전형이 된 케이스는 없는 것 같다. 전주만 나와도 마음이 딸랑이는 그런 크리스마스 노래.  


근데 이게 나이가 들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실제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가 언젠가부터 좀 밍숭밍숭 해진 느낌이다. 반짝이는 불빛과 분주하고 들떠있는 사람들. 길거리에 울리는 가요와 캐롤. 크리스마스 덕분에 길거리를 걷기만 해도 행복한 느낌이 나는 12월은 언젠가부터 시들해졌다. 내가 너무 어른이 되어버리고 마음이 굳어서, 나보다 챙겨야 하는 아이들이 더 중요해져 버려서 그런 건가. 딱히 신이 나질 않는다.  Mariah Carey -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와 Wham - last Christmas가 흘러나오고, 나의 사랑하는 두 아이가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재롱을 부리면, '지금 이 아이들이 느끼는 그것은 내가 그때 느끼던 것과 얼마가 가까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때의 크리스마스를 지금 느끼지 못한다.


나는 90년대 느끼던 크리스마스를 다시는 느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시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도 크리스마스라는 말만 들어도 기쁘고 설레이는 아이들이, 적어도 그때만큼은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는 어려운 환경의 사람들이. 남들이 전부 위로해 줄 수 없는 나만의 아픔과 싸우고 있는 외로운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간이 더 흐르고 나중에 나중에 그들의 지금의 크리스마스가 나의 그때의 크리스마스처럼 아련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모두에게 MERRY CHRISTMAS!!

작가의 이전글 '-것 같아'는 죄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