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잎처럼 가볍고 단단하게. 6화
— 샌프란시스코 Samovar Tea Bar에서
티아포테카를 준비하던 그 시절,
나는 더 깊이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단지 차를 파는 곳이 아니라, 차가 삶이 되는 공간.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다 문득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차만 전문으로 하는 바가 있다더라.”
차를 업으로 삼고, 전통차와 다도 문화까지 공부해 왔던 내게
‘미국에서 차를 전문으로?’
그 말 자체가 충격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생애 첫 미국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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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샌프란시스코 미션 지구.
새하얀 아침 안개를 뚫고 발렌시아 거리 411번지를 찾아가는 길은
마치 순례자의 여정 같았다.
도심의 언덕을 따라 걸어 올라간 끝에
나는 그곳을 만났다.
Samovar Tea Bar.
외관은 특별하지 않았다.
동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소박한 카페.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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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을 짙게 한, 팔 가득 타투를 새긴 여인.
그녀는 커다란 동 팬에 밀크티를 끓이고 있었다.
인도 마살라 차이의 향신료 향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그녀는 긴 국자를 꺼내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건넸다.
그 장면은
내 머릿속 모든 고정관념을 단숨에 부쉈다.
차는 단정하고 조신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나에게,
그녀는 한 컷의 영화처럼 말하고 있었다.
“차는, 자유로워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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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를 마시는 게 아니야, 경험하는 거지.”
그곳의 주인 제시 제이콥스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그가 만든 공간은
단순한 티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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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차 또한 잊지 못한다.
묵직하고 진하게,
마치 의식처럼 내려준 말차.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안엔 깊은 고요가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서양에서 바라보는 차와 허브는
마치 마법처럼 신비롭고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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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한쪽에는
세계 각국의 찻잎이 유리병에 담겨 진열되어 있었다.
중국의 푸얼, 인도의 다즐링, 그리고…
한국의 녹차도 보였다.
‘우리의 차도 이렇게 세계와 만나고 있구나.’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안의 보수적인 틀을 내려놓고,
내가 만든 차, 하동의 국산차만이 전부라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차로 세계를 잇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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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ovar의 공간은
티 룸이라기보다는 이야기가 흐르는 살롱 같았다.
낯선 이들이 하나의 차 주전자를 나누며 대화를 시작하고,
때로는 실리콘밸리의 CEO가,
때로는 노숙자가
같은 공간에서 차를 즐긴다는 그 진정한 평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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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ovar는 이후
샌프란시스코 곳곳에 지점을 열며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2020년 팬데믹이라는 파도 앞에 결국 문을 닫았다.
발렌시아 거리의 그 첫 매장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날의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녀의 국자질,
공간을 채운 향기,
차를 향한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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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은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미국을 자주 오간다.
매번 다른 도시, 다른 공간을 걷지만
그곳마다 차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나의 식견은 여전히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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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상상한다.
그때 그 용기가 없었다면,
그 길을 걷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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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ovar Tea Bar에서 흘러나온 그 한 잔의 향기는
내 세계를 넓히는 시작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발렌시아 411번지,
그곳에서 나는 차의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여정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