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가 불러오는 마법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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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낭비해도 괜찮다는 신념이 필요하다.
인생을 낭비해도 괜찮다면 시간을 낭비해도 괜찮다면 종이를 낭비해도 괜찮다면
코앞에 목적지가 보여도 돌아갈 마음이 있다면 소설을 써도 상관없을 것이다.
낭비를 낭비로 느낀다면 곤란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렸을 때부터 낭비를 생활화해왔다.
시간을 절약한다거나(아니, 그 많은 시간을 왜?)
잠을 줄인다던가(아니, 푹 자도 시간이 남던데)
하는 일은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아마 그래서 남들보다 더 쉽게 소설 쓰는 일에 매달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소설을 쓴 것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시간은 너무 많이 남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도 어디선가 새로운 시간이 날아와 바닥에 쌓이고 하던 시절이었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병동에 앉아서 바둑과 장기를 두거나 농담을 하면서 어디선가 날아오는 새로운 시간들을 하염없이 죽이고 있었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밤은 겁나게 길었다.
나는 소설을 썼다. 낭비하는 심정으로 소설을 썼다. 낭비해봤자 본전이었다.
낭비하는데도 시간은 낭비되지 않았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다.
소설을 쓰면서 당신은 어떻게 바뀌었냐고
속으로 깜짝 놀란다.
바뀐 걸 어떻게 알았지?
맞다. 바뀌었다.
나는 소설 덕분에 바뀌었다.
달라졌고 (내가 보기에)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됐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더 열심히 듣게 됐다.
한 편의 소설을 끝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택을 해야한다. 무수히 많은 선택 사항을 썼다가 지운다. 나는 그 무수한 선택들을 거쳐왔다. 나는 그게 내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의 선택과 현실 속의 선택은 분명 다르지만
선택하기 위해 결정하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버린 것을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취한 것은 아껴써야 한다.
조금 고쳐서 말하겠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소설 쓰기를 권하고 싶지 않다. 소설은 투입하는 시간만큼 결과물이 나오는 작업이 아니다. 모든 게 더디고, 아주 조금씩 전진하고, 가끔은 (이런, 제기랄!) 뒤로 가기도 한다. 문장들을 이어 붙여 문단을 만들고, 문단을 쌓아서 흐름을 만들고, 흐름을 엮어서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혼자 모든 걸 조사하고, 혼자 책임지고, 혼자 기뻐해야 한다. 하지만 낭비해도 좋은 사람에게는, 다른 걸 버리고 시간을 얻은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신나는 작업이 없을 것이다.
한 문장 다음에 올 수 있는 문장은 무한대다.
무한대의 가능성 중에서 오직 나만이 선택할 수 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모든 걸 조절할 수 있다.
그 쾌감은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해서 마지막 마침표를 찍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 번 빠지면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내가 알기론 불가능하다.
+ 읽으면서 내내 느낀 건, 소설쓰기와 여행이 굉장히 닮았다는 것.
여행을 하며 내가 느낀 것들이 압축되어 있다.
핵심은 과감히 낭비하기로 결단을 내린 사람만이 소설이든 여행이든 뛰어들 수 있다는 것이고
일단 선택했다면 버린 것을 돌아보지 말고 취한 것은 아껴서 선택한 현재를 충실히 낭비해야 한다는 것.
선택의 망망대해 속에 고독하게 내버려져 있지만
오롯한 선택의 자유와 그로 인한 기쁨은 더욱 충만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
이런 낭비의 과정을 통해 버리기만 한 것 같지만,
(비록 혼자만 깨달을 수 있다해도) 나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
뭐가 바뀐 건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는 확신,
그걸 통해 나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한 번 빠지면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내가 알기론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