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누드비치, 세상에 나와 너만 존재하는 곳.

수영을 다시 배우기로 결심했다.

by 김지영
사람이 뜸해지는 해변 끝자락 쪽 바다 구석에서
발가벗은 60대 백인 남자와 40대 라틴계열 남자가
격렬하게 키스하며 둥둥 떠다니고 있는 장면이
턱, 시선에 걸렸다.

스페인 시체스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 파도가 거칠게 넘실대는 바다에서 유영하며 여름의 햇살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한참 구경하다가 '이곳이 말로만 듣던 누드비치구나' 문득 깨달을 때쯤이었다.


세상에 정말이지 자신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몸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은 것처럼.

나이도, 장소도, 시선도 모두 상관없다는 그 열정적인 몸짓이, 족히 백미터는 떨어진 해변 위 절벽 난간에 점처럼 서있는 구경자의 눈에도 띄었던 것이다.


발가벗은 채 해변가에 여유롭게 누워있거나, 물을 보고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를 잡아 안고 물 속에서 걸어나오거나, 파도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물결따라 일렁이고 있거나, 연인과 키스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자유 그 자체. 그 모습 위로 파도가 반짝이며 부서진다.


갑자기 수영이 배우고 싶어졌다. 몇번쯤 시도했지만 나한텐 안되는 일이라며 밀쳐놨던 일이다.

그래, 올해는 나를 마음껏 휘저어 놓기로 결심한 해니까.


'내가 나를 잃어버릴만큼, 속절없이 빠져드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사정없이 뒤흔들리고 넘어질듯 휘청휘청하면서 아주 얄팍하고 가볍게 많은 것들에 두근거리며 살고 싶어요.' -@arimu_write


라는 문장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18년의 가을을 보내고,

19년 초, 내 마음 속 갭이어를 선포한 후 이리저리 휘둘리며 보낸 시간들이 어느새 자리를 잡고 '여기가 다음'이라고 손을 흔들고 있다.


여섯달, 두달, 다시 두달, 그리고 한달 반의 해외여행과 여러 차례의 국내여행. 그 사이에 한없이 게으른 시간과 정처없이 방황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아름다운 봄날에 방구석에 틀어박혀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렸다며 무채색 인간의 괴로움을 토로하던 시간들 속에서 무언가 내 마음을 사정없이 휘저어버리도록 내버려두기까지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나를 지킨다는 건,


외부의 무언가로부터 -여기까지-선을 그어 나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 속으로도,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 속으로도

첨벙 뛰어들어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는 것일 수 있으니까.




전복적인 가능성을 꿈꾸며 다른 나라에 살아볼까 궁리했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여행을 마무리할 때 느꼈던 것처럼, 매일의 다른 일상 속에 반가운 얼굴들을 원할 때 볼 수 있는, 새로운 계획들이 툭툭 눈 앞에 던져지는, 또는 마음 뛰는 일들을 이리저리 계획해볼 수 있는 지금이 썩 마음에 든다.


단 정해진(규칙에 의해 강요된) 출퇴근을 하지 않는 일의 환경을 만들려고 이리 저리 모색 중이다. 지난 두달간-마음은 바빴지만-꽤 잘-나를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해내고 있는 것 같다.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들이 자꾸자꾸 생긴다. 바쁜 마음이 자꾸 발걸음을 앞지르지만 이 길 위에 흩뿌려진 행복의 조각들 앞에 가끔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멈추어갈 여유를 얻는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무엇보다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에 있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서 가끔 찾아오는 바쁜 순간도 그다지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 일상을 욕심껏 짜맞추는데 시간을 좀 많이 쓰고 있지만-이것도 차차 익숙해질 것이다.


여행을 좋아했던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매일 매순간이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고, 그 선택이 다음 선택을 만들어나간다는 것.


그리하여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기쁨에 사정없이 휘청거리거나
슬픔에 속절없이 빠져들어버리는 것.
그러한 순간들로 나를 온통 휘감아버리는 것.
오롯이 살아있다는 매순간의 감각.


이유도 없이 무언가에 빠져들어 휘둘리던 시절이 지나고 사랑할 이유를 분석하고 사랑해도 됨을 증명받는데 마음을 쓰느라 그냥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결국 필요한 건 다시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잃은 순간, 한때는 너무나 광활해서 마음 떨리게 했던 선택의 기회들은 그저 깜깜한 망망대해가 되어버렸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이 내가 선택해야 할 것에 빛을 비추어준다.



이 빛이 어디까지 닿을 지는 모르더라도, 그래서 내가 어떤 세계로 갈 지는 모르더라도 우선 내 마음이 가리키는 바다로 풍덩- 뛰어들어 나를 완전히 담가보는 것. 파도에 사정없이 휩쓸리도록 몸을 맡겨보는 것.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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