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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Nov 01. 2020

베를린에서 휴대폰 없이 여행하는 법

90년대에서 온 아날로그 여행자


베를린, 헬싱키에서 내가 아마 제일 많이 시간을 보냈던 곳은 빈티지숍일 거다. 먼지 풀풀 나는 옷 사이를 뒤적거리다가 맘에 드는 옷을 찾았을 때, 익숙하지 않은 화폐기호 붙은 가격을 내고는 바로 갈아 입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플리마켓에서 악세서리도 많이 샀다. 한국에 와서 잘 입을까? 이런 생각은 일초도 안했던 것 같다. 맘에 드는 대로 사서 맘에 드는 대로 입고 다닌 어느 저녁에는 노신사에게 춤 신청을 했다. 


오늘도 점심시간을 훌쩍 넘게까지 방 안에서 꼼지락대다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겨우 집을 나왔다. 4시쯤에 미술관에 도착했다. 마침 미술관 바로 옆에 맛있다는 샌드위치 가게가 있었다. 가게가 맛있다는 매거진에서도 보고 베를린 친구에게도 들어서 잔뜩 기대했던 집. 오래된 건물 로비 안으로 들어가 2층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찾을 수 있는 간판도 제대로 없는 집. 가게 분위기도 장인 느낌이 풀풀 나는 느낌이어서 기대하고 15유로나 주고 주문했다. 그런데 웬걸, 너무너무 짠 거다. 비싼 샌드위치에 제대로 배신을 당하고 얼른 미술관으로 향했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찮다. 철커덩 철커덩 쇠가 움직이는 소리가 막 들려왔다. 노신사 두 사람은 마침 나오는 중이었다. "미술관 문 닫았어요?"


물으니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현관에 안내판을 가리킨다. 전시를 바꾸는 중이라고. 실낱같은 기대와 함께 미술관 건물이라도 구경하자 싶어서 안으로 들어가보니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미술관 문 닫았어요?" "보시다시피. 다음 전시가 시작할 때쯤에는 이곳에 없을텐데 아쉬워서 어쩌나." 어깨를 으쓱하며 진심으로 나를 위해 아쉬워해주는 것 같은 표정에 잠시 안을 둘러본 후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미술관은 오늘 나의 유일한 계획이었는데 아주 난감해졌다. 종일 게으르다가 갑자기 바쁜 마음이 되어선 이대로 집에 갈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멋진 정원을 가진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번에 마틴이랑 왔을 때 봤던 무도회장이다. 100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곳. 정원에는 테이블이 멋지게 놓여있었고 사람들이 입장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아까 노신사 두사람을 다시 만났다. "이 시간에는 여길 오는게 최고의 선택이지. 잘 왔어." 반가운 마음에 잠깐 대화를 하다가 테이블에 합석하기로 했다. 한 사람은 독일인, 한 사람은 미국인이었다. 독일인 아저씨는 찐베를리너로 은퇴하고 밴드 보컬을 하고 있는 멋쟁이고 미국인 아저씨는 성공한 무역 사업가로 독일에는 비지니스 미팅 겸 친구를 만나러 한달 정도 머무르는 중이라고 했다. 마침 댄스 강습이 있었다. 매일 저녁 강습이 있고 돈을 내고 참여하는 것 같았다. 9시부터는 자유로운 춤 시간이 되었다. 아까 강습을 받았던 사람들이 계속 홀 중앙에서 파트너를 바꿔가며 연습을 이어가는 듯했다. 강습은 못받았지만 춤을 춰보고 싶었다. 이렇게 멋진 댄스홀에서. 내가 어떻게 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우선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강습은 못받았지만 한 곡 함께 추고 싶다고.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춤을 가장 열정적으로 추고있던 남자가 잠시 파트너가 빌 때 빠르게 다가갔다. 나랑도 춤을 추겠냐고. 리드를 정말 잘 해주었지만 그의 리듬을 따라가기가 많이 버거웠다. 그래도 용기내어 신청한 나에게 감사해.


테이블에 앉아있던 노신사들도 춤을 추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나이가 있어서 자신과 춤을 출 파트너가 없을 것 같다고 하길래 손을 내밀었다. 아주 느린 춤에 발 박자를 함께 맞추었다. 현란한 발동작은 없지만 편하고 즐거운 춤이었다. 



미술관을 나와 걷는데 어떤 꼬마가 나를 향해 호다닥 뛰어 왔다. 무슨 일이지 하고 살짝 놀란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니 "I like your bag! Where did you buy it?" 천진한 미소를 있는 힘껏 지어보이며 아이가 말했다.  지난 주말 플리마켓에서3유로를 주고 산 가방이었다. 인어비늘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은 슬링백이 눈에 띄어서 샀던 참이었다. 대단한 칭찬도, 나를 향한 것도 아니었는데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플리마켓에서 사서 나도 어디서 같은 것을 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하니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Thank you!" 또 발랄하게 이야기하고 달려왔던 곳으로 총총 달려간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기만 해도 듣는 사람의 기분도 좋아질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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