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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Mar 29. 2020

값싼 커피, 값비싼 풍경

단돈 4200원. 인도 자이살메르에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잔 값도 안 되는 가격에 천 년된 고성의 아름다운 발코니가 딸린 방을 손에 넣었다. 황금빛 사막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드넓은 창문을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가진 고풍스러운 방이었다. 심지어 화장실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양쪽에서 사막의 바람이 황홀하게 불어오는 통에 외로워질 지경이었다.


'너무 낭만적이잖아. 이런 곳을 혼자 쓸 수야 없지.'

화려한 문양의 등쿠션이 놓인 창문 발코니에 기대앉아 괜스레 책을 꺼내 들었다가 몇장도 채 읽지 못하고 결심했다. 여기는 신혼여행으로 다시 와야겠다고. 결혼이라곤 코털만큼도 생각해본 적 없는 내게도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들고야 마는, 자이살메르는 그런 도시였다.


자이살메르의 고성은 유적지가 아니다. 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의 전쟁터. 세로로 카메라를 아무리 꺾어도 끝까지 담기 힘든 높은 성문을 지나 굽이치는 성벽을 따라 올라가다 직접 만든 팔찌를 팔고 있는 집시들에게 열 번쯤 팔목을 잡힐 때쯤 넓은 광장이 나온다.


광장 한 켠엔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는 소들을 피해 요령껏 볼일을 봐야 하는 공중화장실이 있고 그 옆에선 노점상 아저씨들이 5루피짜리 짜이를 마시라고 목청껏 외치고 있다. 좁은 골목을 따라 빼곡히 늘어선 각종 가게와 식당을 지나다 보면 혼잡한 여느 인도의 도시와 비슷하게도 느껴지지만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 순간,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실감한다.


어딜가나 있는 평범한 창문으로 펼쳐지는 평범하지 않은 풍경에 나는 혼자 자꾸만 낭만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80루피짜리 뗌뚝(*네팔식 칼칼한 수제비, 인도 북부 레스토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뉴) 을 파는 레스토랑에서도 50루피짜리 커피를 파는 까페에 가서도 나는 굳이 좁은 계단을 차곡차곡 올라 루프탑에 앉았다. 그곳에 앉기만 하면 얼마짜리 음료를 마시든 이 아름다운 고성의 주인이 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도시의 야경이 한 눈에 보이는 높은 빌딩에서 몇 만원짜리 칵테일을 마신다 해도,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낭만이었다. 이렇게 매일매일 사치를 부리고도 칵테일 한 잔 값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말 왕족이나 된 듯한 풍족한 여유마저 주었다.



50루피(*현 물가 847원)짜리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오후를 늘어지게 보내다가 하늘이 조금씩 발그레 물드는 것을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행자로서 하루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일몰쇼 감상하기.

‘어디서 해가 지는 것을 봐야 하나.’ 하루를 끝내기 전에 문고리 하나, 자석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더욱 소란스러워지는 시장을 지나 조용한 곳을 찾아 골목 사이사이를 바쁘게 쏘다녔다.


붉은 빛이 자꾸만 넓게 넓게 퍼지고 있어 마음이 조급해지던 찰나였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성 안의 골목길을 다니다가 결국 가장 익숙한 골목으로 돌아왔다. ‘아차. 나는 큼지막한 창문을 세 개나 가진 부자였지!’ 


타다닥- 빠르게 계단을 올라 방문에 걸린 큰 자물쇠에 자물쇠보다 큼직한 열쇠를 밀어 넣어 빗장을 풀었다.



황금빛 흙벽으로 지어진 나즈막한 집들이 지평선을 따라 레고 블록을 뿌려 놓은 듯 펼쳐진 풍경. 그 위로 건조한 사막의 하늘답게 태양이 아주 선명한 붉은 빛을 뿜으며 가라앉고 있었다. 활짝 열어젖힌 창문은 그대로 훌륭한 액자가 되어 주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나만의 방, 천년을 품은 발코니에 걸터앉아 고요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혼자 바라보는 풍경이 벅차게 아름다워 고독해졌다. 고독하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걸까, 문득 생각했다.


서울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값비싼 고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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