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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Apr 11. 2021

은밀한 소통, 알고리즘에 우리가 빼앗긴 것

매일 길을 잃을지 모르고 떠나는 모험

벌써 10년, 집 구석에 박힌 지도 뭉치를 오늘도 버리지 못한다.


이사를 대여섯번은 더 하는 사이, 몇 번이나 그 뭉텅이를 쥐고 고민하지만 정작 그때말고는 제대로 헤집어 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몇 년째 누구도 못알아볼 종이 쪼가리를 이고 지고 다니는 거다. 동그라미가 군데군데 쳐져있는 지도와 조각조각 나 닳도록 해진 이 여행 책자는 휴대폰 없이 여행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유일한 유산이니까.



'아니, 휴대폰 없던 시절도 이젠 상상이 안가는데
휴대폰 없이 여행을 하던 때가 있었다고?'


싶지만 엄청 까마득한 시절도 아니다. 딱 10년 전, 스마트폰이 막 세상에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만 연결되면 돈을 따로 내지 않고도 무제한으로 메시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오던 2011년이었다.


휴대폰 없이 여행하는 건 원한 바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휴대폰을 두 개나 가지고 여행을 시작했거든. 나는 슬라이드를 밀면 무려 24개의 쿼티 자판이 나오는 혁신적인 형태의 스마트폰을 들고 미국으로 갔고, 인턴십이 끝나던 12년 여름에는 이제는 구형이 된 손에 익은 그 스마트폰에 이어서 미국에서 새로 산 최신형 휴대폰까지 가지고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이 반년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지.

여행의 끝에서 다시 여행은 시작되었다.

미국을 떠나기 전 즉흥적으로 출발한 로드트립으로 미국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한 달 반동안 차를 타고 달려 드넓은 서부의 사막에 도착했을 때, 3일 뒤에 콜롬비아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단돈 230불이라는 소리에 다시 한번 심장이 꿈틀했다. 막연히 한국의 정반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로망으로 그려오던 곳이었다.


남미라는 대륙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 조차 모르지만

나에게는 언제든 정보의 바다에 닿을 수 있는 스마트폰이 있었으니까,

망설임없이  호쾌하게 특가 티켓을 끊었다.


그런데,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휴대폰을 줄줄이 세 번씩이나 도둑맞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알아들을 수 없는 새로운 언어 속으로 금방 던져졌다.


이미 여행 중이었지만 여행이 새롭게 시작된 기분이었다. 나는 새로운 경험에 거침이 없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새로운 경험을 위해 떠난 여행이 아니던가. 현지에서 사귄 친구의 파티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거침없이 사귀는 동안 내 최신형 휴대폰은 어쩌면 나의 새로운 친구였을 누군가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즐거웠던 어느날의 파티에 좀도둑이 들었던 것이었다. 파티를 호스트한 친구가 많이 미안해했지만, 이미 즐겁게 보낸 시간을 후회해봐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고작 일주일 뒤에는 여행자 안내센터에서는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허술한 여행객은 소매치기의 눈에 무엇보다 쉬운 타겟이었을테지. 아무튼 나야, 졸지에 세상과 연결될 수단을 몽땅 잃어버린 셈이었다.


그때부터 나에게 여행은 모험이 되었다. 자칫하면 언제든 길을 잃을 수 있었으니까.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서는 인포메이션 센터부터 들렀다. 여러 번 접힌 종이지도를 그대로 다시 펼쳐 직원에게 숙소와 몇 가지 장소를 추천받아 동그라미를 가득 그려 나왔다. 숙소 밖으로 나서기 전에는 숙소 컴퓨터 화면 속 새로운 장소의 위치를 최선을 다해 머리 속에 입력해야 했다. 종이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 일은 금방 익숙해졌다. 새로운 도시에서 지도를 보지 않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성공할 때마다 매번 새롭게 뿌듯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금새 익숙해졌다. 아무 것도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에도, 텅빈 풍경을 오래도록 그저 바라보는 일에도 금방 익숙해졌다.


자기들만의 음악축제를 여는 히피들을 따라가
며칠 동안 전기도 화장실도 없이 살아 보기도 하고,
트럭 운전기사들과 먹고 자면서
1600km의 길을 히치하이킹해서 가기도 했다.

8천원 가량을 주고 산 고물 MP3에 꼬깃꼬깃 우겨넣은 단 32곡의 노래. 수  시간의 버스를 타는 동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들었던 그 노래들은 지금도 떠올리면 선명하다. 그 벅차도록 황량했던 풍경과 그때의 내 기분과 함께.


그때의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도 어쩜 그렇게 겁도 경계심도 없었을까? 선입견 없던 나에게 다가온 세상은 그저 거대한 호기심 상자였다.


온갖 정보와 최신 GPS로 무장한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지금,

모든 것을 미리 확인하고 선택하는 지금,

나는 과연 그렇게 풍성한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매일 크고 작은 모험으로 가득했던 그 놀라운 세계를 어느 순간 나는 잃어버렸다.  


휴대폰 없이 여행하는 네 달의 시간 동안,  발걸음은 언제나 두근두근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어느 오후, 나는 휴대폰 작은 화면 속이 아니라 실제 길 위에서 물건을 팔고 음식을 나르고 사랑하는 사람과 웃음을 나누며 걷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며, 햇살을 만끽하며 길을 걸었다. 길거리 장사꾼이 아무렇게나 흩어 놓은 마테잔의 다양한 모양과 색, 길에서 우아한 탱고를 추던 사람들, 반짝이던 도시의 활기, 사람들의 미소, 그 사이로 언제든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든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은 무섭기도, 설레기도 했다.

일상과 모험, 그 사이 어딘가에 내가 진짜 보고 싶던 것들이 있었다.



고민의 시간들 속에서 지금 하고 있는 것.

정신 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로그아웃하고 싶을 때

디지털 기기와 사회적 연결에서 벗어난 도심 속 비밀공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관련하여 그간의 생각을 담은 영상인터뷰 링크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Ga41inTl_g&t=47s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면 연결되고 싶습니다. 

아래 인스타그램 주소를 남겨놓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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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2편으로 이어집니다.

'그날의 누드 비치, 세상에 너와 나만 존재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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