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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Mar 29. 2021

표지만 보고 고른 LP가 내 취향일 확률은?

알고리즘 시대에 음악을 고르는 방법

오늘도 내 배경음악은 유튜브 알고리즘이다. 첫 곡, 그나마도 처음 단 몇 초를 듣고 그날의 플레이리스트가 결정된다. 그 사이에 내 귀를 사로잡지 못한 음악은 영영 안녕이다. 하루종일 듣고도 오늘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제목도, 가수의 이름 하나도 기억할 수 없다. 그저 오늘의 이름없는 배경이 되어준 이 음악들은 정말 내 취향일까? 그렇다면 이 플레이리스트를 선택한 수만명과 나의 취향은 같은 것인가? 


바야흐로 알고리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나는 이 편리함이 가끔 두렵다.


베를린에서 머무는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나는
빈티지, 플리마켓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쇼핑몰과는 차원이 다른, 시대를 초월하는 다채로운 물건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간 건지 쇼핑을 간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매일 플리마켓 소식을 검색하고, 지도에 있는 빈티지 마켓을 샅샅이 찾아 다녔다. 개성 넘치는 물건들이 총 집합한 베를린의 플리마켓 중에서도 마우어파크는 단연 알아주는 곳이었다. 드넓은 공원에는 각양각색의 물건을 파는 천막들이 질서정연하게 펼쳐져 있고 히피들은 자유롭게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어떤 플리마켓에서도 볼 수 없는 LP콜렉션이 있다. 꽤 큰 규모의 LP 판매 천막이 모여있는 코너로 발빠르게 찾아간다. 


그 안에 가득 쌓여있는 플라스틱 박스에는 엄청난 규모의 LP들이 종잡을 수 없는 규칙에 따라 꽂혀 있었다. 그 사이를 헤집어 맘에 드는 LP를 찾아본다. 물론 음악을 들을 수 없고, 내가 아는 음악가도 거의 없었기에, 순전히 LP표지를 보고 맘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표지를 통해서 어떤 음악이 흘러나올 지 상상은 충분히 해볼 수 있었다. 크기가 큰 LP는 들고 갈 자신이 없어 일반 LP크기 반정도의 미니LP 4장을 골랐다. 독일이니까 독일 느낌 나는 컨츄리 스타일 표지, 여름 느낌 나는 상큼한 표지, 평소에 자주 틀어도 무난할 것 같은 클래식 표지, 어떤 음악이 나올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표지 하나. 한 장에 단돈 1유로지만 나름대로 매우 고심해서 골랐다. 나의 역사적인 인생 첫 LP콜렉션이니까. 그렇게 고른 LP는 그때부터 나의 노란 캐리어에 실린 채로 유럽 여행 내내 나와 함께 했다. 가끔 궁금했다. 그 LP들에서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올지. 


한국에 돌아온 지 일년이 넘도록 엘피 속 음악들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에 있었다. 턴테이블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턴테이블을 산 날, 설레는 마음으로 턴테이블의 바늘 끝을 엘피 위에 톡 올려놓았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언젠가의 상상 속 멜로디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새롭기도 했다. 확실한 건 그 음악들을 고르고, 어떤 음악일 지 상상해보고, 가끔 떠올리는 동안, 그리고 드디어 그 음악이 실제로 흘러나오기까지 기다리고 듣는 내내 그 순간에 푹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음악들을 모두 내가 사랑하게 되느냐는 다음 문제였다. 나는 지금 내가 그간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던 어떤 음악과 세계에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음악을 만들고 연주했던 어느 시절의 누군가들과 만난 것이다. 내가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대로 음악을 찾았다면 이런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독일 컨츄리락을 틀어볼 생각이라도 했을까? 모든 곡이 끝날 때까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온전히 음악을 듣는 일에만 집중했을까? 




'좋아하면 울리는'이라는 웹툰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좋알람'이라는 앱의 '알림'으로 알려주는 세상의 연애를 그린다. 그 세계 속의 사람들은 기계음이 아닌 마음의 소리를 믿지도 못하고 들을 수도 없다.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한단계 더 진화한 좋알람은 현재 좋아하는 마음을 알려주는 것을 넘어 '앞으로 당신이 좋아하게 될' 사람까지 '예측'해준다. 웹툰 속 주인공들은 앱의 기계음을 넘어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좋알람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우연히 누군가를 사랑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이 말랑말랑한 웹툰이 디스토피아처럼 느껴졌다. 


가끔은 아찔했다. 


알고리즘의 편리 속에 살고 있으면서 나의 취향을 스포일 당하는 것에 이렇게 무감각해진다는 사실에. 

영화의 결말은 스포일 당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바득바득 애를 쓰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할 지 맞추려고 갈 수록 진화해가는 알고리즘에는 이렇게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이.  


내가 사랑할 가능성이 있었을 어떤 존재를, 미지의 세계를 마주칠 기회조차 사라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두려워졌다. 나는 그런 기회를 빼앗겼다는 사실 조차 모를테니까. 영영 말이다. 지금 내가 내 취향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 스스로의 선택으로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오롯이 나의 선택이 아닐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나를 휘감을 때면, 알고리즘이 지배한 취향의 세계에 파묻히지 않겠다는 다짐을 조용히 되새기며 표지만 보고 고른 LP 위에 조심스럽게, 그리고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바늘을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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