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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Apr 11. 2021

와이파이도 닿지 않는거대한 호수를 걷다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서의 디톡스 트레킹

걸음걸음. 왼편으로는 윤슬이 빛나는 호수가, 오른 편으로는 색색의 꽃이 피어난 풀밭과 푸른 숲이. 내 앞으로는 다정한 작은 흙길이 펼쳐져 있다.



묵묵히 걸음에만 집중하며 태양이 떠올랐다가 지고 구름이 지나가는 모양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온도를 느낀다. 내 앞과 뒤로는 든든한 동료들이 걷고 있다.


어디서든 적당한 자리에, 하늘과 빛과 우리의 발걸음이 허락하는 만큼 걷다 멈춰서 쉬고 갈 곳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자유. 별이 뜬 밤하늘 아래 잠이 들고 , 눈뜬 자리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단순한 행복.


그냥 이 순간만으로 충분해서, 충분하다고.





디지털 디톡스.

가뜩이나 넓은 땅덩어리인데다가 문명 아닌 자연의 길을 걷고 있다보니 인터넷 신호가 거의 잡히지 않고 그나마도 삼일째 길 위에서 텐트를 치고 가다보니 보조배터리마저 다 쓰고 방전. 덕분에 의도치 않게 디지털 디톡스를 경험하고 있다.

디지털 세계와의 연결을 끊어내고 작은 화면에 붙였던 눈을 돌려 내가,

 이순간 온몸 가득 속해있는 자연을 느끼는 것.

따사롭다. 아침의 여유가 좋다. 눈 뜬 시간에 일어나 기지개 몇 번 켜고 먼저 일어나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밥을 한다. 손빨래를 해서 숙소 마당에 걸어놓으며 잠시 따사로운 볕을 쐰다.


어젯밤 먹다 남은 밥으로 누룽지를 끓였다. 몇 개 없는 반찬에도 밥이 쑥쑥 사라진다. 멀리 떠나와 낯선 이들과 함께 길을 걷고 일상의 순간, 일생의 조각을 나눈다.


"추억이 될 순간을 쌓고 있다." 

라는 문장이 걸음마다 쿵쿵 박힌다. 그런 순간을 순간 속에서 실감하는 순간이 있다.


 빼곡한 순간들.




러시아의 여름도 짧아서 이렇게 소중한 거겠지. 바다같은 호숫가에 수영복만 입고 드러누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이곳에서 우리도 함께 늘어진다.


늘어지는 시간을 불안없이 받아들이고 싶지만 한국이라는 사회, 일상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다시 그 장력에 붙들리겠지? 

사회의 속도에 내 발걸음을 찢어지게 맞추는 일. 바로 그걸 멈추고 싶었는데 말야.



https://brunch.co.kr/@masvida/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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