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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타이 Oct 18. 2023

제모의 음모

알고 싶지 않아 알 수 없었던 것들

“겨드랑이 제모는 해보셨죠?”



처치실 문을 닫고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누운 내 양 눈 위에 무언갈 올리는 통에 여의사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다. 



1인용 침대 하나와 레이저 기계 하나면 꽉 차는 작은 방에 오직 그녀와 나 둘 뿐이다. 눈 위에 올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지만, 겨우 눈꺼풀만 한 요망한 두 개의 추는 눈꺼풀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충분히 무겁고,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그녀의 익숙한 손놀림은 이미 내 팬티를 발목까지 내리고 있다. 아무래도 들어서자마자 내 눈을 가려버린 것은 일종의 선제공격, 이 방의 권력은 그녀에게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나 보다.



‘옴마. 이게 뭐야'



겨우 5초 만에 악당의 손에 붙들려 성고문 당하는 울트라맨 꼴이 된 나는 하염없이 후회했다. 산부인과도 아니고 피부과에서 팬티를 내리게 될지는 정녕 몰랐다. 왜 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하아.



비키니라인 레이저 제모를 결정한 것은 불과 사흘 전이다. 매일 저녁 수영 수업을 갈 때도 매일의 잔디깎이 노동쯤 대수롭지 않다 여겨왔으나, 막상 수영을 가지 않아 면도를 하지 않는 요즘 부쩍 우람해 보이는 음모를 보고 레이저 제모를 하기로 한 거다. 면도를 자주 하면 점점 더 굵은 털이 난다더니, 어느덧 가랑이 사이에 전현무를 키우는 기분이었다.



겨드랑이 제모는 수년 전에 해봤고, 원체 빈모라 3회 시술 만에 아주 보송한 겨드랑이를 가지게 되었기에 당연히 그때처럼 아주 간편하리라는 생각만 하고, 미처 부위가 다르다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쁘띠시술은 홈페이지에서 날짜와 시간만 예약하면 간단하게 받을 수 있다. 내 경우도 그랬다. 프랜차이즈 피부과 카카오톡 특가 알림 메시지를 통해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이벤트 항목에서 제모를 누르고 겨드랑이 밖에 안 나왔을 때 잠시 멈칫했으나, 다시 일반 시술, 제모 카테고리를 찾아 ‘겨드랑이, ‘사타구니’, ‘비키니’까지 쉽게 이르렀다. 겨드랑이는 확실히 아니고, 사타구니와 비키니 중에 내가 박멸하고자 하는 부위를 무엇이라 부르는지 고민했을 뿐, 그 외 다른 고민은 없었다.



비키니라인 레이저 제모, 비키니를 입었을 때 깔끔하게 보이기 위해 하는 시술로만 알고 있었을 뿐, 왜 이를 시술하는 장면은 제대로 떠올려보지 않았나. 아니 잠깐. 내가 정말 제대로 이를 떠올려본 적이 없나. 스멀스멀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몇 해 전 수영인과 데이트할 때의 일이다. 데이트 중인 수영인은 잘 트리밍 된 음모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레인의 다른 남자들이 겨드랑이는 말 할 것도 없이 음모까지 얼렁뚱땅 배와 허벅지에 난 털과 마찬가지로 밖으로 꺼내놓고 다니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수영모와 손바닥만 한 역삼각 수영 팬티를 입으면 그의 모든 체모는 문명 아래 사라진다. 어느 날 그토록 완벽한 털관리 비결을 묻자 그는 말했다.



“자기야~ 당연히 피부과 가서 레이저 제모했지. 요즘은 남자도 관리를 해야 사랑받는다~”

“엥? 온몸의 털을 다? 헉 남자 의사가 했어? 간호사도 자기 그거를 보는 거야? 닿으면 어떡해? 막 커져버리는 거 아냐? 피부과가 아니라 비뇨기과 가야 하는 거 아냐?”

“어어. 기억도 안 나! 의료행위에 남녀가 어딨냐!”



내 것도 아닌 그의 의료 장면은 생생히 그려내던 내가 정작 내 것은 어림도 잡지 못하다니, 무릎을 좌우로 벌린 채로 여의사에게 손가락 빗질을 당하던 나는 문득 쏟아지는 질문세례에 버럭 하던 그가 떠올랐다. 잘 살고 있겠지. 그때 너는 수치를 알았구나. 캐물어서 미안해. 미스털 댄디.



“수면 마취로 하시면 십만 원이 추가되세요”



알고 싶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던 음모 제모가 끝나고 내친김에 이 울쎄라 시술 상담 예약도 잡아뒀던 나는 상담실장이 하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어머 울쎄라를 수면 마취까지 하고 해요?”



그저 따끔하다고 생각해 왔던 레이저 시술이다. 최근에는 울쎄라 등의 레이저 시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술을 위해 방문한 사람들도 수면마취를 찾는 사례가 많아졌다. 고통 없이 예뻐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우리가 정말 피하고자 한 게 고통일까. 아니면 수치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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