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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타이 Jul 29. 2024

"왜 이렇게 오랫동안 안 보였어요?"

기술 1. 질문하면서도 궁금해하지 않는 기술

어린이집과 학원들이 쉬는 7말 8초, 바야흐로 여름휴가 시즌이다. 지난주 금요일 수영 강습엔 평상시 인원의 반만 참석했다. 출석률만큼은 국대 수준을 자랑하는 우리 연수반 레인 사람들도 장사 없다. 


"우와 출석률 너무 저조하네요"

"오늘 레인이 텅텅 비어서 두배로 힘들 것 같아요"


그렇다. 사람들이 안 오면 돌아야 하는 거리가 길어진다. 종료지점에 늘어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마진도 사라지고, 밀려 만들어내는 교통체증도 사라진다. 핑계 댈 것도 사라지니 어쩐지 힘이 빠지는 것을 보면 출석률이 너무 좋은 것만큼이나 텅 빈 레인도 별로다.


내 여름휴가는 이미 지난주에 끝났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는 이미 휴가를 다녀온 자라고 누가 말했던가. 희망은 사라졌지만 아직 내겐 수영장이라는 갈 곳이 있다.


여름휴가 다녀오느라 수영 강습에 일주일 넘게 빠졌다. 가끔 퇴근하고 술자리에 가느라 듬성듬성 안 간 날은 있지만, 이렇게 통째로 한주를 빼먹는 경우는 거의 없는지라 휴가에서 돌아오니 다들 한 마디씩 묻는다.


스몰토크 주제로 휴가만큼 좋은 것도 없다. 


"어디 갔다 왔어요? 오랫동안 안 보이던데"

"아 네 휴가 다녀왔어요"

"어디 갔다 왔어요?"

"카자흐스탄이요"

"카자흐스탄? 거기 위험하지 않나?"

"아 네 저도 잘 모르고 갔는데 하나도 안 위험하더라고요"

"거기 물가 싸요?"

"물가가 서울이랑 똑같아서 끼니마다 몇만 원씩 훅훅 나가더라고요."(전쟁 때문에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건너와서 물가를 확 올려놨다. 현지인들도 불만이 많은 상황)

"거기 뭐 보러 가요?"

"네 자연이 스위스 같은 느낌이에요"(근데 나 스위스 안 가봄)


잠시 정적이 흘러 내 쪽에서 묻기 시작한다.

"휴가 언제 가세요?"

"저는 멀리 못 가요. 휴가를 길게 못 써서"

여기서부터 대화의 기술이 필요한 난코스다. 오은영 박사라면 "휴가를 길게 못써서 멀리는 못 가시는군요. 멀리 가고 싶으세요?'라고 했을까.


나는 잠시 정신이 혼미해진다. 뭔가 이미 슬프기 때문이다. 이미 길게 행복한 휴가를 다녀온 입장에서 휴가를 길게 못 써서 어디 멀리 못 가는 그녀에게 이미 조금 미안하고 민망하다. 졸지에 그녀는 휴가 길게 못 써서 멀리 못 가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말한다.

"얼마나 좋아. 미혼이니까 자유롭잖아. 여행도 길게 다녀올 수 있고"


주위에서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다 같이 코러스를 넣는다.

"미혼이라 얼마나 자유롭고 좋아. 어디든 갈 수 있고"


졸지에 미혼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아! 이렇게 우리의 지평은 딱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멀리 나아갈 수 없는 거구나. 


미혼이라고 부양할 가족이 없겠는가. 자유롭지 못한 나의 여러 상황들을 생각하며, 과연 나의 여행이 내가 미혼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생각해 본다. 혼인 여부보다는 경제력이 더 큰 이유 같은데.. 아냐 경제력보다는 '30평대 아파트'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수영장에 가면 항상 낯빛이 좋은 그녀가 있다. 길게 이야기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얼굴에서 좋은 빛이 나오는 그녀를 볼 때마다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속하지 않은 그녀의 세상을, 그녀가 속하지 않은 내 세상을, 우리가 공감할 날도 올까? 결국 서로가 같은 세상에 속해있음을 인지할 날도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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